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도 고양이 Oct 21. 2019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었던 연을 끝내자.

고향으로 내려왔다.


내려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존감을 다시 찾는 일이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던 내 예전 모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운동을 했다. 불어버린 살부터 먼저 없애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충 두 달 동안 20킬로 정도를 뺀 것 같다. 칼 같은 식단관리와 운동으로 철저하게 생활을 관리했다.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채우기로 했다. 미뤄두었던 번지점프를 하러 가기도 하고 당일치기 무계획 여행도 몇 번인가 떠났다. 고대하던 클라이밍을 시작했고 옷과 향수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시계와 사치품도 사보고 새 반지와 좋은 이어폰도 샀다. 사고 싶어서 침만 삼키던 카메라 렌즈도 샀다. 책을 한 아름 사다 쌓아두고 읽었고 차도 다양하게 사서 주말에 우려 마셨다.


온전히 나를 위해, 내 삶의 방향을 나에게로 돌렸다. 나에게 집중한 삶을 살기로 했다. 당분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평일에는 아버지 농원에 나가 일을 도왔다. 사진도 찍고 글도 쓰며 시간을 보냈다. 온전히 내 삶을 나로 채우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행복이라는 게 조금씩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몸무게가 이만큼 빠졌다. 지금은 더 빠지고 있고.


그러던 중 고용노동부에서 연락이 왔다. 체불금품 확인원. 진정 제기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 회사는 민사소송 진행을 위해 이를 발급해준다. 임금을 받지 못한 직원 40여 명을 한 날 시간대를 나누어 불러 모았다. 얼마나 밀렸는지, 어떻게 밀렸는지, 서류로 써서 제출하라는 말과 마지막 세 가지 선택지 중에 한 군데에 체크하라고 이야기했다.


밀린 임금을 지불받게 되면 고소를 취하할 여지가 있다.

이 체크박스에 표시한 것은 아직까지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오래간만에 빛 그 자체 매니저와 다른 직원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담소나 나누다가 눈치 없게 끼어드려는 임원 한 명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돈 문제 해결되고 이 지긋지긋한 인연이 끊어지면 편하게 다시 보자며.


체불금품 확인원은 다음 주에 바로 나왔다.


히히히힣 돈! 돈을 내놓아라!


내가 받지 못한 돈이 얼마인지 총액이 상세히 적혀있는 이 종이 두 장을 들고 법률구조공단으로 갔다. 민사 소송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제 전 직원에서 채권자가 되었고 회사는 전 직장에서 채무자가 되었다. 소송의 결과가 나오는 건 그리 길지 않았다. 한 달이 조금 안 되어서 지급명령서가 나왔고, 이를 지급할 능력이 회사는 당연하게도 없으니 근로복지공단으로 가서 체당금을 신청했다. 드디어 길다면 긴 이 악연이 끝나가는 기분이었다.


연말정산 환급금과 이자는 체당금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이건 체당금으로 줄 수 없다고 해서 못 받는 돈이 되겠구나 하고 막연히 숫자들을 보았다. 이 정도면 연 끊는 데에 싸게 먹히는 걸까? 회사가 언젠가는 지급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방법을 찾다가 어느덧, 이 생각마저 잊힐 만큼 내 삶을 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대표에게 걸린 형사소송을 취하해줄 수 없냐는 부탁이었다.


나는 받지 못하는 돈 나머지를 준다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처음엔 줄 수 있는 여력이 안 된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이 정도 되는 돈으로 사람을 고소하고 처벌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인가 고민했다. 이런 걸로 악의를 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혼자 고민할 수 없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친구는 이 짤을 보내주라고 했다.


아버지는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이든 한 주 정도 맛있는 거 먹고 푹 자면 잊을 거라며 지금 생각하지 말고 그때 가서 냉정히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빛 그 자체 매니저는 선처해준 대표가 바로 등 돌리고 연락 무시하고, 그렇게 받아야 할 돈 날려도 괜찮다면 하라고 했다. 친구는 그 대표가 돈을 주기 위해 일말의 노력이라도 했는지 물어보았다.


모든 조언을 조합하여 나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내가 돈을 못 받고 그동안 고생했던 일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으며 지금 마음이 편안하다고 해서 누굴 선처해주고 뭘 더 희생하고 하는 일이 조금 같잖다고 느낀 것도 같다. 나 하나 때문에 길거리에 대표가 나앉을 리도 없으며, 설령 그렇게 돌아간다 해도 그건 그가 지은 죗값의 일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다시 편안해졌다.


얼마 후 대표에게 몰래 연락이 다시 왔다. 나 포함 소수의 인원들에게 나머지 돈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야 염치라도 있을 것 같다며. 나는 그제야 흔쾌히 취하서를 써주었다. 써서 보내주자마자 앓는 소리로 가득가득 구구절절 보내던 문자가 단답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내 결정이 잘 한 선택이었음을 직감했다.


사실 그래도 받지 못한 돈은 남아있었다.

나는 회사를 상대로 계좌에 압류를 걸고 남은 재산이 있는지 조회를 신청했다.


이제 진짜 끝이다. 망할 회사.


끝이 보였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회사와의 인연이 정리되는 듯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