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도 고양이 Oct 16. 2019

모든 직원의 퇴사

월급을 못 주겠으니 모든 직원들은 퇴사하십시오.

우리를 모두 모은 대표는 다 모인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회사는 임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으니 이달부로 모두 퇴사하라는 지시였다. 사정이야 모두가 뻔히 아는 사실이었고 더 이상 붙잡고 닦달해봐야 돈 나올 구석 없는 건 모두가 아니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밀린 월급은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나오는 대답은 석 달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자기도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 자기도 모회사의 피해자이고 계속되는 거짓말에 희생당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 그 정도가 다였다. 나는 고소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눈빛을 빠르게 훑었다.


본부장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자리가 끝나고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어보았다. 이렇게 갑자기 모두 회사에서 밀어낼 줄은 피차 몰랐던 사실이었고, 그러면 아직 직원으로 남을 수 있는 이 시점에서 뭐라도 진행되어야 일은 더 수월해질 것이다. 차라리 그게 낫지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불안함 가지고 회사에서 쫓겨날 바에는. 근데 그게 쉽지 않았다. 본부장은 이상한 이야기만 했다. 고소 절차나 체당금 절차에 대해서만, 동문에 서답을 준다.


끊임없이 살짝살짝 찔러본 질문에 흘리듯 본심이 나왔다. 어렵다고.


압류로 걸 수 있을 것 같았던 목적물들은 확실하지 않았고 대표가 이미 눈치채고 손을 쓰고 있는 듯했다. 재산 상황을 전부 파악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노력해봤지만 무엇하나 되지 않고 있다는 듯했다. 나는 퇴사할 땐 하더라도 위임장은 써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으나 아직 준비 중이라고 때 되면 말해주겠다고 계속 미루었다. 결국 퇴사하는 날 채근해서야 사인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보니 위임장을 없애버렸는지 고소가 합쳐지지 않아 있었고, 압류 외 다른 고소건은 아예 연관되어있지도 않았었다.


아주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압류는 참여하지 않은 사람에게 배당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본부장과 같이 일을 꾸미던 경영지원 팀장이 흘린 말을 들어보면 애초에 사람들을 배제하고 자기들만 위임장 쓰고 조사하고 일 꾸미던 이유가 이런 것이었던 것 같았다. 안심하라는 말 대충 둘러대면서.


뭔 어딜 둘러봐도 나쁜 놈들밖에 없어.


잡을 줄이 모두 사라졌다. 그나마 선택지라고 생각했던, 썩은 동아줄이라고 생각하고 버려두었던 선택지마저 사라졌다. 나에게 남은 건 고소뿐이었다. 길고 길 싸움이 시작될 터다. 이미 우리는 모두가 진정 제기를 끝마친 상태였고 퇴사 이야기를 듣자마자 진행 여부를 묻기 위해 근로복지 공단에 전화해야 했다.


담당자가 연결되는 건 꽤 어려웠다. 대기인수 안내 멘트를 듣다 보니 새삼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이 정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하고 마음 한편이 짠해졌다. 어렵게 연결된 담당자는 회사 이름을 듣자마자 너무 건수가 동시다발적으로 많이 들어와서 일처리에 애를 먹고 있다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녹음된 멘트처럼 줄줄 읊어댔다. 말미엔 그저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회사는 떠밀리듯 나오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퇴근하던 날, 나와 빛 그 자체 매니저는 전동 킥보드를 빌려 회사 근처를 한 시간 정도 돌다가 헤어졌다.


그래도 빨리 달리니 약간은 후련해지더라. 육성재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긴 기다림이 이어졌다. 불안했냐고 물어보면 불안하진 않았던 것 같다. 정말 많이 알아보았고 최악의 경우라 해도 극복할 방법도 여러 가지 가지고 있었다. 정말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그 시간 자체가 정말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퇴사 이후 처음 맞는 평일, 나는 아침에 눈을 떴다가 다시 누워 잠을 잤다. 억지로 잠을 청하며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가 억지로 눈을 감다가 오후 늦게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지 않았으나 피곤하고 싶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보았다. 월급은 월급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일은 일대로. 그 어떤 무엇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그 하나하나의 요소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떠올려가며 곰곰이 씹어 삼켰다. 배고프지 않았으나 허기가 졌다. 뭐든 사다가 입에 쑤셔 넣으며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멍하니 마음 안쪽 깊은 곳을 핥아댔다.


하필이면 집 근처에 닭강정 맛집이 있었고 그 짧은 시간에 살이 10킬로가 넘게 쪘었다.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곳은 나의 꿈이 아니었다. 그 쓰레기 같았던 얌체공도, 멍청한 광스터와 무능했던 대표들과 임원들도, 진상 부리던 클라이언트 놈들도,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높은 위치인 그들의 자리가 내가 되고 싶었던 목표와 꿈과 비슷한 무언가였더라면 될 수 없을 터고 되고 싶지도 않았다. 노력한다고 뭐가 될 수 있을까.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내가 이딴 것들을 버텨서 뭔가가 된다 한들 그게 진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조직 생활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비즈니스로 사람이 사람을 상대할 때 좋지 않은 단점들이 여러 가지 있다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각각의 단점들의 끝을 모두 맛보고 나온 느낌이었다. 어떤 조직은 좋은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이상적인, 꿈의 기업이라 말하는 그런 회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겪은 조직은 아니었다. 이 회사가 나에게 최대의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 전 회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꺾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제는 굳이 꺾이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나머지는 그저 희망고문이었다.


알 수 없는 허기에 끊임없이 입에 음식을 밀어 넣으며 뭔가라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쓰레기봉투 가장 큰 것을 한 묶음 사 왔다. 집에 있는 대다수의 물건들을 꽉꽉 눌러 담아 모두 버렸다. 미련 때문에,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기억과 인연 때문에 쓸데없이 붙잡고 있던 대부분의 것들을 버렸다.


안녕!


새까만 밤이 몇 번인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서울을 떠났다.

이 회사와의 지독한 연이 끝날 기미를 보이게 되는 건 이로부터 몇 달 후의 일이다.

이전 27화 고소는 마치 눈치게임 같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