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책을 참 좋아했다.
무엇 때문에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움직이는 것보다는 글 읽는 게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길거리 간판과 광고 전단지를 보며 한글을 익혔고, 뭔가 읽는다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유아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한편에 거의 장식용으로 꽂혀있던 책을 집어 읽었을 때는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책을 아끼지 않으셨다. 무슨 전집부터 시작해서 온갖 책을 사다 주셨다. 나중에는 서점에서 거리가 먼 시골로 이사를 갔어도 항상 1주일에 한 번은 시내로 나와 책을 사서 품에 안고 집에 돌아갔다. 언제나 엄마는 책값만은 아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타지 생활을 하며 가난하게 살 때도 사고 싶은 책은 반드시 사서 보았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결벽 같은 것이 생겨버렸다.
오랫동안 책을 사모으고 사모으던 나는 책만큼은 깨끗하길 원했다. 책의 표지와 띠지 같은 외적인 깨끗함도 물론이고 안에 필기나 표시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책을 활짝 폈을 때 구겨지는 것도 싫고 표지에 주름이 가거나 접히는 것도 끔찍하게 생각한다. 언젠가 돈이 정말 너무 없어서 아끼던 책을 고르고 골라 중고서점에 팔 때가 있었는데, 모든 책의 상태가 새책과 같아 돈을 꽤 많이 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런 나에게 도서관은 책을 빌려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읽고 싶은 책은 사서 봐야지, 사서 보고 내 마음에 든 책들에게 내 손 닿는 책꽂이에 한 자리를 내어주어야지. 하는 생각이 꽤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빌려 보는 건 생각보다 귀찮고 힘들었다. 험하게 다뤄진 책들을 보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내 것이 아닌 활자를 빌려다 보고 돌려줘야 한다는 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서관에 대한 로망은 있었다.
오래된 책 냄새도 좋고 수많은 책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도 좋았다. 숲에 있는 것 같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할 일 없을 때는 학교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있는 것도 좋아했고, 12살이 되자마자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었다. 물론 책을 빌려보는 것에는 꽤 인색했다.
그랬던 도서관이 십몇 년 전, 내가 학생이었던 시절에 새로 지어진다는 소문이 들렸다.
들리기에는 전국 최대 규모라고 했다. 건물 외벽 전체가 통유리에 층고 높은 층이 다섯 개나 생기고 넓은 부지에 무슨 공원같이 꾸민다고 한다. 무슨 놈의 도서관이 그렇게 커지려나. 책을 빌려보는 사람은 있나. 뭐 여러 가지 생각이었지만 결국 도서관은 내가 충주를 떠나기 전까지 완공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타지 생활 중에 충주를 찾았을 때, 완공된 도서관은 정말이지 웅장했다. 이 정도면 전국 최대 규모 맞는 것 같다. 뭔가 자랑할만한 랜드마크가 생긴 것도 같아 기분이 좋았다. 회원증도 옛날 것은 종이를 코팅했던 단순 회원증이었다면 이젠 플라스틱 카드로 발급해준다고 했다. 그 멋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회원증을 갱신했다. 사람들은 많았고 책은 여전히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책 책장 사이에 들어가서 책 냄새에 파묻혀 잠깐 조는 것은 주말을 보내는 작은 일탈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책에 대한 여유가 없어졌다.
활자는 업무 중에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피로했다. 서점에 가도 한참 구경하다가 책을 몇 번이고 집었다 놨다 했다. 몇 번인가 생각 없이 골랐던 책들의 내용이 심하게 부실한 걸 보면서 책의 가격과 가성비를 철저하게 따지기 시작했다. 따지고, 재고, 신경을 곤두세워 대하다 보니 자연스레 예전보다 멀어졌다.
내가 다시 도서관을 찾은 건 얼마 전의 일이다.
집 앞에 있는 이 거대한 유리 덩어리는 이제 전국 최대 규모의 도서관도 아닐 것이다. 그 당시 큰 건물에 유행하던 통유리는 냉난방에 불리한, 비효율적인 건축 구조다. 이제는 오가는 사람도 없고 있다 해도 뭔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공부하기 위해 오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적해서 더 좋네, 하고 건물로 들어가 보았다. 새 것의 기억이 옛 추억이 되어버렸고 현재의 도서관에는 묻어버린 세월의 흔적이 다정했다. 뭔가 아이러니했다. 말끔해서 유리창이 눈부시던 건물은 군데군데 얼룩지고 여기저기 생긴 건물의 상처들이 정겨웠다. 너도 나이 꽤 먹었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에 씨익 웃어본다.
나는 열람실로 올라가 적당한 자리에 앉아 등을 깊이 기대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여전히 오래된 책 냄새가 기분 좋은, 우리 동네 도서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