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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x 신 x 포도

by 이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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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머리카락이 하나 둘 빠지기 시작해서 모두가 대머리가 된 것이 아니라 그냥 갑자기 한날 한 시, 머리카락이 뿅! 하고 사라져 버렸다. 일부 원래 대머리였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엄청나게 동요했다. 애써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관리하기 위해 영양제를 바르고 있던 사람도,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서 한창 시술받던 사람도, 세상에서 가장 긴 머리카락의 기네스 심사를 위해 길이를 재고 있던 사람도 모두 한 순간에 얼어붙어버렸다. 하나 좋았던 점은 하수구를 막고 있던 사람들의 머리카락마저 사라지면서 갑자기 배수가 엄청나게 잘 되는 것 정도였다.


가발 역시 사라졌다. 인모로 만든 건 당연히 사라졌고 인공 가발도 모두 사라졌다. 모발을 흉내 내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가 무의미해졌다. 사진, 영상 속, 매체에 있던 머리카락들만이 유일한 존재 증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절망했다. 갑작스럽게 바뀐 풍경과 본인의 거울에 비친 반들반들한 두피는 잊고 살았던 모발의 소중함을 강제로 일깨워주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대책도, 대응도 없는 정부에게 분노한 대머리들이 광장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한낮에 시작된 시위는 서로의 두피에서 반사된 광채가 눈부시고 반사된 빛은 빌딩 창문으로, 다시 반사된 열과 빛은 지상으로, 그리하여 시위대 서로를 덥게 만들기 충분했다. 맹렬했던 시위의 기세는 자연스레 사라지기 시작했고 중간중간 힘 빠진 대머리 몇은 다른 사람의 두피에 맺힌 땀방울에 비춰 보이는 본인들의 대머리를 보며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때였다. “길을 비키시오!’’ 하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시위대 뒤쪽에서 났다. 그곳은 놀랍게도 머리카락이 두피 한가운데 마치 뿔처럼 자라난 건장한 젊은이들이 상의를 탈의한 채 얀 배기팬츠를 입고 거대한 가마를 어깨에 지고 시위대를 가르며 앞으로 걷고 있었다. 대머리들은 눈을 반짝이며 손을 뻗었으나 젊은이들은 손을 찰싹 때리며 허리춤에 꽂혀있던 빗에 왁스를 발라 머리카락을 꼿꼿이 세우며 앞으로 걸어갔다.


시위대 앞까지 간 젊은이들 무리는 무릎을 꿇었고 가마를 내려놓았다. 가마 문이 열리는 순간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가마 안에는 아름다운 흑색 머리카락이 무성하게 찰랑거리는 남자아이가 앉아있었다. 남자아이는 밖으로 나와 젊은이들 중 가장 건장하고 머리카락이 손바닥 정도 되는 두피에서 덤불처럼 자라나 있는 남자의 어깨에 목마를 타고 올라갔다. 그러고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다가 그 사이에 묻혀있던 마이크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스피커에서 울리듯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야이 놈들아. 너희는 왜 그렇게 모발 건강에 무신경했느냐. 내가 친히 너희들의 머리카락을 빼앗아 봉인해 놓았느니라.” 남자아이는 어린 목소리였지만 시건방진 노인의 말투로 사람들을 향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아주 마음에 안 들어 진짜. 그렇지만 머리카락이 없어져 매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너희들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빼앗긴 했으나 내 마음도 편치가 않다. 해서 음, 클래식한 방법을 생각해보았지.” 남자아이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저 멀리서 방금 전 사내들 보다는 숱이 덜하지만, 확실히 몇 가닥이 위로 삐죽 솟아있는 사내 수십 명이 어깨에 피라미드 같이 생긴 큰 제단 하나를 들추어 매고 으쌰 으쌰 하며 나타나 제단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는 제단으로 올라가 맨 위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제단 아래쪽 기둥에는 우퍼 스피커가 있었는데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맛있는 과일을 가져다 바치는 자에게 그에 합당한 머리카락을 하사하겠노라.” 사람들은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며 서로를 보았다. 한참의 침묵을 깬 건 어떤 아주머니였다. "저기.." 하는 기어들어갈 소리와 함께 무리 가운데서 슬며시 손 하나가 올라왔다. 그 주변을 시작으로 술렁거리며 사람들이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는 머리가 반들반들하지만 이마 아래로 조금은 주름 진 것 같은 한 여자가 서있었다.


여자는 주춤 거리며 사람들이 터준 길을 걸어 제단을 향했다. 시종일관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살피며, 머뭇거리기는 하지만 한가닥 희망이라도 걸어보겠다는 의지가 분명한 발걸음으로 조심스레 제단으로 올랐다. "저 이게 아침에 먹다가 남은 걸 주머니에 넣고 한 알씩 먹던 건데요.." 여자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포도알 하나를 꺼냈다. 먼지가 좀 보이는 거 같아 황급히 옷소매로 표면을 문질러 남자아이에게 건넸다. "이게 진천산 샤인 머스켓인데요.. 달아서.."


남자아이는 턱을 괴고 거만하게 보고 있다가 포도알을 받아 씹었다. 몇 번 씹으며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포도알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음, 12 브릭스.” 하고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이리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여자는 자연스레 몸을 낮추어 다가갔고 남자아이는 손가락을 쭉 뻗어 여자의 두피에 대고 스윽 문질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문지른 지점에서 광채가 나더니 머리카락이 쑤욱 자라났다. 여자는 잠시 얼어붙어있다가 자라난 머리카락을 눈으로 확인하더니 기뻐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르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제단을 뛰어내려 갔다. 쥐 죽은 듯이 모두가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흩어져 과일을 찾으러 가기 위해 달렸다.


그날 이후 제단 아래로 과일을 바치려는 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후 계속된 관찰로 밝혀진 사실은 과일의 크기와 당도에 비례하여 머리카락을 자라게 해주는 면적과 가닥 수가 결정된다는 것이었으며 12 브릭스를 넘었을 때는 기존의 모근의 강화까지 기대해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알게 된 사람들은 당도측정기를 들고 다니며 달다고 소문난 과일을 얻기 위해 엄청나게 여행하기 시작했다. 내수 산업과 운수업이 급격하게 활성화되고 미친 듯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유래가 없을 정도의 경제성장이었다.


또한 학계를 비롯한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온 힘을 합쳐 당도가 높은 과일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단순히 당도 놓은 과일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효율적으로 적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적당한 모발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과일을 바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결과 빠른 속도로 질서 정연하게 과일을 바쳐 머리카락을 하사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당도에 만족한 남자아이가 손으로 두피를 쓰다듬으면 머리카락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남자아이를 모발의 신이라고 불렀다. 그가 행하는 발모의 기적은 유래 없는 신앙을 만들었으며 전무후무한 종교 대 통합을 이뤄냈다.


이후로 꽤 오랜 시간 동안 결국 많은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과일들의 당도는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며 농업은 역사적으로 유래 없는 발전 속도를 얻었고, 이는 훗날 인류의 식량난을 70% 정도 해결한 요인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과일을 바치는 제도적, 과학적 시스템 역시 비약적인 성과를 이루어냈고, 이는 훗날 제조업의 비약적인 성장과 더불어 인류의 문명 조차 한 단계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얻게 된다.


사회의 성숙도 이뤄냈다. 전 세계 사람들은 발모의 은혜를 업고자 너도나도 남자아이의 신전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줄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엄청난 광경을 보여주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노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 누구 하나 튀지 않았고 겸허하고 공손한 자세로 과일을 가져다 바쳤다. 가난하여, 혹은 힘이 없어 과일을 구하지 못한 자들은 더 많이 가진 자들에게 나눔 받았다. 모두가 똑같이 모발이 사라진 고통을 체감하고 있었고 감히 그 고통 앞에 남보다 내가 먼저, 나만, 과 같은 이기심을 가지는 것은 한낱 인간이 도달하기에는 꽤 영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남자아이는 만족한 얼굴과 굉장하게 살이 쪄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또다시 모발에 소홀히 하면 내가 찾아올 것이니라.”라는 말을 남긴 채, 재단을 번쩍 들어 으쌰 으쌰 하는 젊은이들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사라진 길 뒤로 수많은 발모인들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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