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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x 오늘의 커피 x 악마

by 이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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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악마랑 지우개 따먹기를 하셨다는 거죠?”


백발의 노인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치매라도 걸린 노인네일까. 아씨 잘못 걸렸다. 하필 나는 오늘 커피를 마시러 이 카페에 왔고, 하필이면 글감이 없어 좌절하고 있었고, 하필이면 이 구석에 힘없이 앉아있는 할아버지 하나가 교복을 입고 있길래 뭔가 기구한 사연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싶어 커피 한 잔 사겠다며 말을 걸어본 게 오늘의 이 의미 없는 시간 낭비의 원인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지우개 따먹기가 좋았어요. 곰돌이 지우개로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요. 아 작가님은 지우개 따먹기 게임을 아시나요? 한 번씩 번갈아가며 지우개를 한쪽 모서리를 눌러 뒤집어서 상대방 지우개에 걸치면 1점. 완전히 올라타면 3점. 총 3점을 먼저 따면 이기는 게임이에요. 이 게임에서 저와 곰돌이는 최고의 파트너였어요. 귀부분이 볼록 튀어나와서 지렛대같이 누르는 발판을 만들어주거든요. 저는 그걸로 우리 학교 챔피언이었어요. 곰돌이 지우개는 내 상징이자 심장 같은 아이였지요. 근데 어느 날 그놈이 데뷔한 거예요. 옆반 문구점 아들.


반칙이었죠. 이 업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놈이었으니까. 이놈이 어느 날 점보 지우개라면서 지 필통 반만 한 지우개를 들고 나타난 거예요. 옆반은 그걸로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아이들의 비명과 널브러진 지우개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죠. 기세가 등등해진 문구점 아들은 저에게 도전하겠다 했어요. 모두가 기대하는 세기의 타이틀 매치가 성사된 거죠. 저는 무패의 챔피언답게 타이틀 도전을 받아주었어요. 그런데 수업시간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이기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어요. 저 거대한 크기에 유린당하다 결국 바닥의 지우개들처럼 곰돌이도 그렇게 끝나겠구나 생각했죠. 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피나는 수련을 했어요. 오랫동안 상상만 해오던 필살기, 곰돌이 귀를 튕겨 높이 띄워 지우개를 한 번에 업히는 기술을 완성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 점보 지우개의 높이를 상상하며 손가락을 혹사시켰어요. 그래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손가락이 부러지는 기분이었지만, 저는 멈추지 않았어요.”


노인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들어 올려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가 아픈 손가락을 붙들고 잠을 자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거는 게 들렸어요. ‘어이- 이기고 싶나?’ 하고요. 저는 이게 무슨 꿈인가 싶어 일어나 돌아봤어요. 거기는 온몸이 새빨간 이상한 남자가 까만 양복을 입은 채로 요란하게 생긴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더라고요. ‘얼마나 이기고 싶었으면 나한테까지 그 바람이 들렸겠어. 이리 와바 내가 너와 너의 친구를 지지 않게 해 주지.’ 그는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했어요. 저는 혹시 이게 거래고, 그 대가로 영혼이라든가 뭔갈 팔아야 하는 거냐고 물어봤어요. 근데 그런 건 필요 없고 그냥 취미생활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그대로 푹 잠들었고 다음날 일어났을 땐 그게 꿈인 줄 알았어요. 그래도 그런 꿈이라도 꾸고 나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들어 당당하게 학교로 갔죠.


가자마자 그 문구점 아들을 찾아갔어요. 자신감이 사라지기 전에 승부를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교실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는데 제 위로 그림자가 스윽 지더라고요. 고개를 들었는데 웬 근육이 엄청나게 우람한 외국인 하나가 터질 것 같은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서있는 거예요. 아니 이미 팔은 근육으로 찢겨 나간 모양새였어요. 미국에서 전학 왔다나 봐요. 뽀글 거리는 금발을 하고선 점보 지우개를 발로 밟아 뭉개는 중이었어요. 한눈에 알아봤죠.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거대한 지우개. 아니 그건 지우개라고 하기도 뭐했어요. 마치 거대하고 견고한 바윗덩어리 같은, 거대한 고무 집합체였어요. 점보는 저기에 당한 거구나. 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어요. 이 친구 미국에서 한가닥 하던 놈이구나. 저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제 친구를 꺼냈어요.


점보의 복수 같은 걸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사실 그런 괴물을 보면 도망가야 하는 게 맞죠. 당연한 거였을 거예요.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에요. 그런데요. 당연하게도 절대 못 이길 걸 아는데 이상하게 꼭 질 것 같지 않았어요. 저는 이 자신감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덤볐던 거예요. 뭐 사실 이 자신감은 1분도 못 가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이에요.


그 외국인 전학생은 얼마나 힘을 줬는지 온몸에 핏줄이 설만큼 근육을 부풀려서 지우개의 모서리를 주먹으로 내려쳐가며 공격해왔어요. 그 정도는 해야 뒤집힐 것 같은 지우개이긴 했어요. 지우개는 공중에 떴다가 떨어질 때마다 책상을 부술듯한 소리를 냈거든요. 그런 걸 어떻게 이기겠어요. 곰돌이로는 피하는 게 최선이었어요. 높게 뜨는 점프가 장기였던 저와 제 곰돌이도 그 지우개는 한 번에 피했다가 올라탈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어요. 조금만, 한 뼘 정도만 더 높게 띄울 수만 있다면, 그걸 위한 아주 작은 발판이라도 하나 있다면, 그러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될 리가 없었죠.


결국 전학생의 지우개가 곰돌이를 덮쳤어요. 저는 그대로 게임이 끝나는 줄 알았어요. 다행히 귀 부분만 살짝 걸렸더라고요. 저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곰돌이를 빼냈어요. 전학생은 이번엔 그대로 지우개의 가운데를 후려쳐 살짝 띄우면서 다시 제 곰돌이를 공격했어요. 교실을 가득 메우는 진동 소리와 함께 지우개 밑 깊숙한 곳으로 곰돌이를 끌어들이며 점수를 냈고요. 꼭 거대한 괴물이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는 조그마한 존재를 다시 집어 아가리에 삼키려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2점을 빼앗기니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제 곰돌이도 저 점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건가. 손이 덜덜 떨리면서 저는 곰돌이를 꺼내기 위해 손가락을 넣어 밖으로 튕겨냈어요. 그렇지만 곰돌이는 빠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자랑스럽던 귀가 끝에 걸려있었어요. 이러면 저의 패배예요. 전학생 턴에는 아무것도 안 해도 플러스 1점이니까. 저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가만 보니 저는 지지 않았더라고요. 귀가. 귀가 부러져 있었죠. 아마도 연속으로 공격을 받으며 살짝 떠 있는 저 부분이 충격을 심하게 받은 모양이었어요. 이렇게 되면 저희 학교에서는 점수로 인정하지 않아요. 경기는 속행이죠.


외국인 전학생은 화가 많이 났나 봐요. 본인이 살던 나라에서는 그런 룰이 없다며 혼자 분에 겨워 욕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뭐 누가 알아주겠어요. 우리 학교에 왔으면 우리 법을 따라야지. 그러다 화를 내며 지우개를 주먹으로 내리쳤는데 순간, 책상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며 금이 가고 심하게 흔들렸어요. 그때 저는 가능성을 보았죠. 부러진 곰돌이의 귀가 그 괴물 밑으로 들어가며 아주 작은 틈, 발판을 마련해준 것을요. 그리고 그 충격으로 제 곰돌이가 떨어져 나간 귀 위에 살짝 걸쳐 발판 모양새가 된 것도요. 저는 놓치지 않았어요. 필살의 승부. 그 찰나의 순간에 저는 손가락을 높이 들어 곰돌이의 이마를 정확히 가격했어요.


그렇게 딱 한 뼘의 높이만큼 더 뜬 곰돌이는 저와 함께 그날의 전설이 되었죠.”


노인은 고개를 들어 환희에 찬 눈으로 말을 이었다. “이후로 전학생은 모습을 찾을 수 없었어요. 뭐 상관하지 않았어요. 저는 정말 만족했죠. 근데 그 만족감이 오히려 마음에 독이 될 줄은 몰랐어요. 그날 그 엄청난 승부가 저를 더 이상 평범한 지우개 따먹기 게임에 만족하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버릴 줄은 말이에요. 이후에 제 상대는 없었어요. 점보 건 코스모스 건 심지어 벽돌 조차 저를 이기지 못했어요. 아니 위협도 되지 않았죠. 그냥 한 번 튕기면 그대로 게임이 끝났으니까요.


천 판 정도 이겼나? 심한 권태감과 함께 집에 돌아오니 그 빨간 몸의 사내가 앉아있더라고요. 그날 그 테이블 너머에서. 그가 그랬어요. 혹시 사는 게 재미없지 않냐며 자기와 함께 진정한 게임을 해보지 않겠냐고요. 테이블 위에는 그때 그 전학생이 가지고 있던 거대한 지우개가 놓여 있었어요. 이 게임에 판돈으로 지우개는 필요 없다며, 그가 제시했던 건 저의 시간이었어요.


작가님, 작가님은 제가 왜 교복을 입고 있는지 물어보셨죠. 이게 어제의 이야기라면 믿으시겠어요? 저는 그냥 지우개 따먹기를 좋아하던 고등학생이고 지난밤 악마와 지우개 따먹기를 하다가 해가 뜰 때까지 밤새도록 지기만 해서 결국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의 시간을 빼앗겨버렸다면 말이에요. 아침에 거울을 보니 이대로는 등교할 수 없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등교하는 길에 있던 이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 시간이 가기를, 그래서 그와의 승부를 다시 한번 기다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노인은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그가 올 시간이에요. 저는 오늘 마지막 게임을 할 겁니다. 남은 수명을 모두 걸고 다시 한번 게임을 하겠어요. 혹시 만약 제가 이기기라도 한다면... 내일 이 카페에서 다시 뵐 수 있을지도 모르죠.” 나는 그저 그가 치매에 걸렸다 생각하며, 낭비했다고 생각한 아까운 커피값을 셈했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그가 카페를 나가는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지우개 따먹기 게임이라니, 자기가 고등학생이라니, 이렇게나 어이없는 이야기가 세상에 또 있을까.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나는 다음날 알 수 없는 설렘과 기대 반, 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다지 실망하지 말자는 생각 반 가지고 카페로 향했다. 서너 잔 정도의 커피가 얼음만 남기고 사라질 때쯤, 마침 어제 노인이 카페를 나간 그 시간이 되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걸 보며 나는 그럼 그렇지 하고 일어날까 싶어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카페 유리창 너머로 고등학생 무리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어제 노인이 입고 있던 그 교복이었다.


학생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무리 중 한 명이 슬쩍 카페 쪽을 보더니 잽싸게 뛰어 들어와 나에게 다가왔다. 어디서 많이 본 헤어스타일, 얼굴, 분명 처음 보는데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으로 어어, 하며 손을 드는데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학생은 그런 나를 보고는 환히 웃으며 테이블에 뭔가를 놓고는 “커피값이에요.” 하고 다시 그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귀 두 쪽이 모두 떨어져 나간 작은 곰돌이 지우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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