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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x 야식 x 거짓말

by 이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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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구라 치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건데 원래는."


김실장이 패를 섞으며 말했다.

"오늘은 손모가지 말고 그냥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정과장을 슬쩍 보더니 박사장 쪽을 보며 자기 뒷목을 손 날로 탁 친다.


"아니 뭐 손모가지든 모가지든, 우리가 언제 구라 친 적 있다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실장님."

정과장이 실없이 허허 웃으며 들어온 패를 조심스럽게 쪼아 본다.


"아유 뭐 확실한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신 있으시면 동의하시는 겁니다들."


이 대화를 끝으로 세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과 적막이 흘렀다. 오늘은 어떤 형태로든 이 도박장 손님 세 사람의 마지막 판이 될 예정이었다. 자욱한 담배연기 사이로 담배 문 입에서 나지막이 뱉는 콜, 레이즈, 다이 같은 외마디 단어가 나지막이 도박판 위로 떠돌았다. 이 적막을 깬 건 정과장이었다.


"우리 배도 출출한데 꼬마 시켜서 야식이나 먹읍시다."


-


"그러니까 새끼야. 너는 그냥 제일 높은 패 하나만 건네주면 된다고."


정과장은 도박판에서 심부름하는 꼬마를 벽에 밀어붙이고 낮게 노려보며 속삭였다. 정과장이 꼬마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이름과 다르게 덩치는 커서 힘은 잘 쓰게 생겼다. 그럼에도 꼬마라고 불리는 이유는 말을 심하게 더듬으며 어딘가 위축되어 눈치를 살피며 소심하게 행동하는 탓이었다.


꼬마는 여러 소문의 대상이었다. 어릴 때부터 온갖 폭력에 시달려 꼼짝없이 명령에 불복종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라든가, 사실은 머리가 좋았는데 도박에 잘못 손대는 바람에 머리를 크게 얻어맞고 기억을 잃어 여기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라든가.


어느 쪽이든 정과장은 상관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꼬마에게 패를 건네받아 크게 이겨먹었다는 이야기를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었던 날, 이건 기회라고 생각했다. 매번 박사장과 김실장에게 털려 이제 더 이상 잃고 죽을 돈도 없었다. 딱 한탕 크게 해 먹고 빠질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서자 정과장은 조용히 꼬마를 불러내 위협하며 명령했다.


"내가 일단 상황 봐서 출출하지 않냐고 물어볼 거야. 야식이라도 먹으면서 하죠, 하고 너를 부를 거라고. 알아들어? 너는 그때 야식 그릇 밑에 제일 높은 패 하나만 꼬붙여 들고 들어와. 알았어?"


"과.. 과과장님. 그.. 그.. 그러시면 아.... 안 되는..."


정과장은 꼬마 뺨을 한 대 후려쳤다.


"닥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


"정 과장이 그런 부탁을 했다고?"


김실장은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꼬나물고 가만히 생각 중이었다. 꼬마는 그 앞에 엎드려서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혹여나 다른 누군가 이 상황을 보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한 마음이었다.


"별일이네. 샌님이라 구라는 안 칠 줄 알았는데 어지간히 급하셨나 보네. 뭐 또 너한테 따로 부탁한 놈은 더 없고?"

"기...김..김실장님...이... 누가.. 이상한 부탁한 거...있으..면...마...마마..말해달라고..."


김실장은 일어나 꼬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아니 내가 말한 거 말고 이 등신아. 답답하네 거. 근데 그 새낀 장 짜리 두 장을 더 받겠다는 건데. 더 받아서 어쩌려는 거지? 어차피 뻔히 걸릴 구란데. 버려서 숨기는 건 자신 있어도 다시 꺼내 쓰는 건 어렵고 뭐 그런 건가?"


김실장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구라 치다 걸리면 죽여버리겠다고 겁을 크게 줘버리고 이번 한 판으로 다 털어먹고 버려야겠다고.


-


"그 새끼 뭐 하나 할 줄 알았다니까."


박사장이 꼬마를 앞에 세워놓고 정과장의 부탁에 대해 막 보고받은 참이었다.


"그동안 잘 털어먹었는데 너를 눈치챘단 말이지. 그럼 이제 못 써먹는데 어떡하면 좋냐. 아, 혹시 김실장도 이거 알아?"


꼬마는 고개를 소심하게 끄덕였다.


"아이 뭘 겁을 먹고 그래. 괜찮아 괜찮아. 내가 괜찮다고 했지? 우리 그동안 잘 해왔잖아 그렇지?"


박사장이 꼬마 양 어깨를 잡고 고개를 앞으로 쭉 빼서 꼬마와 강제로 눈을 맞추려 들이댔다.


"근데 꼬마야. 만약에 내가 정과장한테 패 주지 말라고 하면 어떡하냐?"


꼬마는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손님에게 거스르지 말 것. 꼬마가 이 도박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이 조건을 어길 때마다 꼬마는 죽기보다 더한 시달림을 받아내야 했다. 그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꼬마는 확실한 도박판 단골 손님들의 종이 되었고 손님들은 알게 모르게 각자가 이용했다. 공공연한 비밀이자 단골에게 제공해주는 일종의 서비스이며 유흥거리였다.


"그건 안 되는구나. 어떻게 한다.. 음.."


박사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좋은 묘수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낮게 말했다.


"장땡은 나한테 주고 정과장은 다른 패로 주자. 정과장이 너 어떻게 못하게 내가 커버 쳐줄 테니까 응? 그 정도면 딱히 정과장한테 많이 어긴 것도 아니잖아? 구체적으로 뭐 달라고 하진 않았다며. 그럼 내 장땡 빼고 제일 높은 거 주면 되겠다 그렇지? 구땡이라든가 응?"


꼬마는 벌벌 떠는 눈동자에 소름 끼치게 웃는 박사장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


꼬마가 그릇에 야식을 담아 내온다. 정과장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 보는 척하며 눈을 흘기니 시야에 그릇 밑 손가락 사이에 끼워온 화투패가 보인다.


'저런 등신 같으니 저렇게 잘 보이게.. 들키면 어쩌려고.'


김실장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정과장에게 안심을 주기 위한 약간의 오버액션이었다. 박사장은 이 둘이 진땀을 빼며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어가 보려고 하는 게 하찮아 보였다. 꼬마가 야식을 내려놓는 사이 박사장은 고생했다며 꼬마 등을 토닥이는 척하며 능숙하게 꼬마 옆구리에 몰래 달아둔 주머니 쪽에서 순식간에 화투패를 꺼냈다.


'그럼 그렇지 새끼.'


박사장은 장땡이 손에 들린 걸 보고 들키지 않게 아주 살짝 미소지었다. 분명 호기로운 김실장은 이번 판에서 정과장이 구라를 쳤다며 뭐든 한판 해보려 들 것이다. 돌아가는 판 보고 운이 좋으면 김실장도 털어먹을 수 있을 거라고 계산이 섰다.


정과장은 열심히 준비한 손기술로 기존에 들어온 패를 워커화 안으로 밀어 넣고 꼬마가 준 패를 보려고 했다. 워커화 안에는 이미 아까부터 열심히 쑤셔넣은 장 두장이 들어있었다. 눈치 못 채게 넣었다 생각하며 안심하고 허리를 펴는 순간 김실장이 소리 질렀다.


"잠깐! 정과장 이 새끼야. 이건 경우가 아니지. 구라 치면 대가리 깨진다 했냐 안했냐."


정과장은 깜짝 놀라서 패를 까 볼 생각도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며 반사적으로 테이블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아니 시.. 시 시발 깜짝이야. 뭐야 증거 있어?"

"과장님이 숨겨둔 패 꺼내오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야 꼬마야 일단 문 걸고 거기 빠따 들어."


꼬마는 세 사람이 있던 별실의 문을 딸깍 걸어 잠그고 문 옆에 있던 나무 방망이를 조용히 들었다. 숨겨둔 패를 꺼내? 정과장은 혹시 김실장이 꼬마에게 패 받는 건 모르고 워커화로 손이 간 걸 보며 넘겨짚고 있는 게 아닐까 순간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발이라도 빼보자.


"아니 시발 증거 있냐고!"

"증거? 있지. 내가 증거는 잘 모르겠도 그 패 아직 안 봤는데 그거 왠지 내 생각엔 장땡인 거 같은데? 그렇지? 내가 이 패 안 봤는데 맞추면 이상한 거잖아 그렇지? 방금 전에 신발로 손 간 것도 수상하고 새끼야. 그것도 이따 까볼 거니까 일단 기다리고."


정과장이 패로 손을 뻗으려 들자 김실장이 정과장 손목을 낚아채고 소리 질렀다.


"우선 이거 장땡이다에 내 대가리랑 돈 다 건다. 장땡 나올 확률이 얼마 인지는 내가 모르겠는데, 진짜 장땡이라 내가 이기면 네가 구라 치다 걸린 거 인정하고 니 새끼 돈까지 내가 다 받아간다. 알아들어?"


정 과장은 목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때 박사장이 조용히 테이블 앞으로 몸을 숙이며 낮게 말했다.


"김실장님. 어찌 그리 사람이 급하실까.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이렇게 판 망치시면 곤란한데."

"아, 박 사장님. 들어오실 거 아니면 그냥 조용히 꺼지고 이따 남은 돈으로 한 판 치시죠."


박사장이 허탈하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대 앉는다.


"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판에 껴야죠 뭐. 그 패가 장땡인 거에 거신다 하셨죠? 그럼 저는 제 패가 더 높다에 걸게요. 나도 뭐 내 대가리랑 돈 다 걸면 대충 판돈 맞나?"


박사장이 의기양양하게 패를 뒤집어 테이블 위로 툭 깐다. 장땡이다. 장땡이 두개라고? 하며 란 김실장은 눈이 동그레지며 정과장의 패를 집어 들었다.


"어... 어? 이게 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꼬마가 방망이로 김실장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순식간에 김실장의 이마가 테이블에 처박혔다가 뒤로 튀어올라 그대로 쓰러졌다.


"어이구. 그래 잘했다. 시간 끌어봐야 좋을 게 없어. 서로서로 응? 줄 건 주고 맞을 건 맞고 다 그렇게 빨리빨리 재끼고 가자고."


박사장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김실장 쪽에 있던 돈을 테이블 가운데로 모으며 말했다.


"어떻게, 이제 우리끼리 쇼부를 보셔야지?"


김실장의 피가 얼굴에 튄 채로 덜덜 떨고 있는 정과장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만 있었다. 박사장은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나는 돈만 받아가면 돼.라고 웃으며 정과장이 놓친 패를 집어 들었다. 그때 얼굴빛이 변했다.


"어? 뭐야 이거."


박사장이 고개를 들어 정 과장의 눈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시발 이게 왜."


그 순간 박사장의 눈에 들어온 건 김실장의 피가 묻은 꼬마의 나무 방망이였다. 사정없이 후려친 꼬마의 방망이에 튕겨나간 박사장의 머리가 바로 도박장 바닥에 처박혔다.


-


정 과장은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게 어찌 된 건지 박사장이 쓰러진 곳으로 기어가 손에서 패를 빼앗아 들었다.


"이게 뭐야... 비?"


그때 뒤에서 꼬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과장님... 그거 제....제일 높은 패... 맞지요?"


정 과장은 고개도 못 돌리고 말했다.


"응.. 응 그렇지 인마. 잘했다. 그래 장 짜리 10월 보다 비 12월이 더 높지 그래그래."

"그...근데요 과장님.....그... 비는.. 서서...섯다에서 안 ...쓰는 패지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휘감았다. 정 과장은 목 뒤가 서늘한 걸 느끼며 뒤로 돌았다.


"그...러면, 어,"


꼬마가 방망이를 들었다.


"걸리셨다고 봐도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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