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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짝 Feb 01. 2021

나는 이제 이랑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원래는 이랑을 정말정말 좋아한다. 들을 때마다 너무 눈물이 났다. 나는 울고 싶을 때마다 이랑의 노래를 들었다. 가끔은 따라 불러도, 이랑의 노래를 끝까지 따라부른 적은 없다. 이랑의 노래를 부르다가는 목이 메었기 때문이다. 욘욘슨은 울면서 부르지 않지만, 잘 듣고 있어요는 눈물이 난다. 환란의 세대는 눈물이 난다. 신의 놀이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럭키아파트는 눈물이 난다. 뭐 대충 그런 식이다. 기준은 나도 모른다. 어떤 것은 산뜻하게 우울하고, 어떤 것은 유쾌하다. 로쿠차 구다사이 같은 거. 


아무튼 나는 한동안 이랑의 노래를 듣지 못했다. 조울증이 낫고, 의사에게 더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은 이후엔 나는 나를 혹시나 우울하게 할 소지가 있는 것들을 전부 멀리했다. 친구는 환란의 세대를 들으면 어쩐지 해소가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우울의 그림자조차 밟기 싫었다. 나는 여전히 우울증에 걸린 내 친구들을 이전만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억은 하고 있는데 그게 뭐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그렇게 자신을 비관했던 그 기억이, 개구리 올챙이적 기억보다 더 빨리 사라져갔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치 평범한 사람들이 우울증과 조울증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 그리고 응원의 말 덧붙이기 정도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힘내! 잘될거야! 기운내! 나가서 운동을 좀 해봐! 같은 무심한 소리를 마구 내던지지 않는 것. 그때의 깊은 절망만큼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다고, 내가 완전히 내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감히 누가 그것을 부정하면 그것이 더 화가 났었다. 그것만은 선명히 기억해서 입조심 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 나는 우울과 꽤 거리를 뒀다. 조증이 가지는 특성들도 내게서 사라져갔다. 과잉 성실, 강박. 하루에 다섯 가지 일을 하기로 해놓고 네 가지 일을 하면 자신을 마구 비난하는 그런 것들. 조증이 막 즐겁고 그런 게 아니다. 조증은 자신과 타인을 몰아세운다. '이렇게 되어야만 해.'라는 강박.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지각하면, 상대가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내가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이 화가 났던 게 그게 조증이었다. 


나는 좀 게으름도 피울 수 있게 되있고, 미래를 낙관할 줄도 알게 되었다. 아이, 못할 수도 있지 뭐. 오늘은 끝내주게 잘했어!를 반복하면서 '길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게 너무 기뻤다. 언니 제가 일을 미뤘어요. 그런데 하나도 화가 안 나지 뭐예요. 그래서 일을 아주 쪼끔만 했어요. 내일 너무 힘들까봐. 1을 못했다고 망했다고 난리를 치지 않고 0.3을 하고 좋아하고 있어요. 우와! 모든 게 망한 것 같지 않아요! 약속시간에 5분이 늦었다고 그 사람이 날 싫어할 것 같지 않아요! 


아무튼 그래서 우울의 그림자도 조각도 너무 두려웠다. 내 인생과 내가 사랑하던 어느 부분들은 그 어두운 곳에 있는데 혹시나 내가 또 무너질까봐. 그리고 이번에 무너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봐. 하지만 희노애락이 있으면 슬픔도 감정이다. 어떻게 전혀 슬픔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랑의 노래는 슬픈 영화를 보는 것과는 좀 다르다. 


내 삶에서 무엇이 나아졌느냐 하면 그걸 말하기가 참 애매하다. 돈을 더 버는가, 아니오. 부모님 집에 얹혀서 겨우 살고 있습니다. 독립은? 요원하죠. 세상에 제자리가 있습니까? 아니오. 안정은 좀 찾았나요? 아니오. 반지하 방에서 인생이 이렇게 끝날까봐 바들바들 떨던 때보다 나는 좀 더 나은 성취를 하고 있습니까? 그...을쎄요. 그때보다는 ... 좀 더 능숙하긴 합니다.... 객관적으로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등처먹기 쉬운 작가입니다. (아니, 그런 시도는 늘 있으니까... 이제 잘 알아서 피하는거지 작정하고 속이려고 들면 사람이 못 당해요) 그러니까 이랑이 노래하는 환란의 세대는 너무나 내 이야기고, 그건 영화 속 인물의 이야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과는 조오오금 차이가 있다. 최소한 영화속 인물은 좀 ... 너무 인생을 극적으로 살고 있고 이랑 노래의 사람들은 그냥 나처럼 살고 있다. 내가 좀 더 나은 것은 그냥... 기분 뿐이다. 기분이 나은 것이다. 그러니까 더, 그게 날 우울로 들어가게 만들까봐 너무 두려웠다. 


하지만 정작 노래를 들었더니 두렵지 않아졌다. 우울한 노래들이 꽤 있지만 우울하라고 만든 노래가 아니니까. 슬픔을 노래하는 것은 슬픔에 잠겨있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한날 한시에 다 죽어버리자고 말하는 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 노래에는 내가 우울하던 시절의 절망이 아니라 내가 우울하던 시절에 거기서 벗어나려고 치던 발버둥과, 내가 엄청 냉철한 이성으로 내 인생이 망했다고 결론지은 그 속에서 '혹시 근데 내가 잘못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 인생이 진짜 그렇게 망했을까.'하는 희망적인 의심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랑의 노래를 '잘못 기억하고 멀리한' 것이다. 다시 이랑을 좋아할 수 있어서 나는 오히려 더 행복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목이 메어 부를 수는 없어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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