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불교에 관심이 많아졌다. 정확히는 불교 명상에. 그러다보니 관련 책도 읽고 불교에서는 세상 일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는구나, 하는 것을 배우고 있는데 그 중에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업을 조건으로 존재가 태어난다는 이야기인데, 이 업이라고 하는게 반드시 하나의 값이 나오는 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다. 악업을 많이 지었다고 반드시 악처에 태어나는 게 아니며, 선업을 많이 지었다고 반드시 선처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의 좋은 업, 나쁜 업과 임종 직전에 발생하는 업이 윤회를 결정하게 하지만 이것이 명확하게 1:1로 대응하는 게 아니며, 업의 조합으로 내세에 태어날 곳이 결정지었다고 해서 다른 업은 영향이 전부 사라지느냐 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음생에 어디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돌려 돌려 돌림판이었다. 선업을 많이 쌓으면, 돌림판에 선업의 비중이 커진다. 악업을 많이 쌓으면, 돌림판에 악업의 비중이 커진다. 하지만 돌림판을 돌렸을 때 걸리는 게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태어나는 곳을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가져온 비유이다. 책에서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스님이 우연히 좋은 천을 선물 받아 ‘내일 이 옷으로 가사를 지어야겠다.’했는데 그날 저녁에 체해서 급사하고 말았다. 이 스님은 평생 선업을 쌓았지만 죽기 전에 옷에 대한 집착이 하필 생겨서 다음 생에 가사에 붙은 이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평생 선업을 쌓았으므로, ‘이’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나니 선처에 태어났다고 한다.
물론 이 태어남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선처든 악처든, 태어남이 있어 괴로움이 생기는 고로 진정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기는 하지만, 이번 생에 아라한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정확히는 아라한을 향해 수행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과 애착을 놓는 대신 벗어남의 행복을 얻고, 그것도 놓을 수 있게 되어야 아라한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은 깃털처럼 가벼워지겠지만,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운하지 않을까? 하지만 바로 이런 생각이 애착이고, 아무래도 나는 애착이 너무 큰 사람이라서 이번 생에 아라한은 어려울 듯 하다.
하지만 분노가 많이 줄어들고 마음에 안정이 생기는 등 여러가지 이점이 있으므로, 완전하지 않으면 소용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마 계속 명상을 하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세속에서의 삶을 조형해 나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