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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짝 Apr 18. 2021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어떤 세상인데요, 설명해 보세요.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잊고 있다가 생각이 났다. 요즘에 어떤 세상인데, 그런 게 어딨어.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요즘 어떤 세상인지 그런 게 뭔지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년에 날 따뜻할 때 당구장 알바를 하러 갔다. 시간대가 괜찮았고 시급도 괜찮았다. 월에 이 정도 수입만 있어도 좋지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사흘만에 도망나왔다. 일을 시작한 첫 날, 매니저라는 사람이 말했다. 


"요즘은 뭐 여자 알바라고 막 함부로 대하고 그러지 않아. 그런 세상도 아니고."


들었을 때는 그냥 그렇구나 했다. 응, 그렇구나. 그렇지. 여자알바라고 딱히 더 함부로 대해진 적도 없는데 뭐. 사실 나는 그런 아저씨들을 살면서 별로 못봤다. 그냥 평범한 50대 아저씨 말이다. 당구장에 오는 평범한 50대 아저씨. 왜 당구장에 굳이 '여자 알바'가 필요한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알바를 갔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거기는 '시중 드는 여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여자 알바라고 함부로 대한다.'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다른 것이다.... 


굳이 따지면 당구장 여자 아르바이트의 일 자체가 함부로 대해지는 것이 메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일은 '마이크로 어그레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단 손님이 오면 밝게 인사해야 한다. 옷도 어느 정도는 좀... 입어야 한다. 사실 그래도 대면 알바라서 멋을 내고 갔는데도 츄리닝 입고 오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당황했는데, 뭐 어르신들이니까 그렇지. 하고 끄덕끄덕 하기는 했다. 여기까지는 서비스직이라면 다 그런거니까, 오케이 오케이. 내가 오랜만에 서비스직 해서 패션에 감을 좀 잃었을 수 있지. 인사는 당연히 밝게 해야지. 오케이 오케이. 


하지만... 어어어어... 일 자체가 되게 좀 하녀 같다. 맥주집 알바도 여기요! 하면 네~ 하고 가서 주문 받고 음식 주고 달라는 거 갖다주는 거긴 한데 당구장은 좀 다르다. 세팅! 하고 외치면 네~ 하고 가서 공을 깔아주고... 손님들이 거는 이야기도 좀 받아줘야 하고... 적당히 네네 하고 웃어주고 장단도 맞춰주고... 중간중간에 가서 뭐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신지 음료가 더 필요하진 않으신지 ... 내기 당구를 치는데 이 돈 쟤한테 줘라, 같은 단거리 심부름도 있고...? 하지만 뭐 무릎이 안 좋을 수 있지. 그렇지. 끊었던 담배가 조금씩 간절해졌다. 적어놓고 보면 딱히 이렇다 할 건 없다. 손님이 말 좀 걸 수 있지. 농담 좀 할 수 있지. 딱히 뭐 성적인 농담이 있었던 것도 아니긴 했는데- 피씨방 알바의 경우엔 내가 끝없이 손님의 니즈를 살피고 물어보고 할 필요가 없다. 맥주집도 비슷하다. 고-급 레스토랑의 경우엔 물 좀 더 달라고 하기 전에 물이 채워지지만, 맥주는 더 주세요! 할 때 더 주면 된다. 


하지만 당구장 알바는 손님에게 끝없이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이었다. '제가 계속 신경쓰고 있어요^^' 라고 하는... 전부 단골이기 때문에 빠르게 얼굴과 이름과 음료 취향과 물수건을 몇개씩 쓰는지 등등을 다 외워야 했다. 출근한지 이틀 사흘 째에 왜 이걸 기억을 못하냐, 너 나 모르냐는 말을 꽤 들었다. 물론 옆에서 며칠이나 되었다고 쟤가 그걸 외워,라고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근데... 너, 얘, 쟤...잖아...? 


그래도 매너가 좋은 아저씨는... 그러니까... 요즘 세상에 아가씨 아가씨 그러면 안되니까 내 성이 뭐냐고 묻더니 나를 '김양'이라고 불렀다. 기...김양... 그래, 음. 김양일 수 있어. 그래도 이제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이 분들도 잘 해보려고 하는거니까요...? 


결과적으로 내가 일 그만둔 이유는 거기 관리자라는 사람이 (사장이 아니고) 설거지 하고 수건 개고 돌아댕기고 하는데 슬쩍 슬쩍 만져서였다. 더 어릴 때였으면 엥? 응? 에이 설마? 어쩌다 스친건데 내가 예민한 거겠지? 했을 법한 그런 슬쩍슬쩍 터치들. 하지만 난 작년에 서른이었고 그런 터치가 다 의도적이라는 건 20대 내내 경험으로 익혔다. 몰라서 그런 거 아니고 균형 못잡아서 그런 거 아니고 어쩌다 그런 거 아니다. 노리다가 기회 되면 하는 것이다. 관뒀다. 


아무리 회사가 좆같아도 최소한 무슨 씨고 무슨 님이다. 물론 쿠사리를 먹고 가끔 반말도 듣고 클라이언트가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기도 하지. 그리고 나를 직급 이상으로 아랫사람 취급하는 일도 늘 있지 한국 사회의 위계라는 게 뭐 그런 거지. 근데... 이건 좀... 아니 이런 세상은 좀 너무 놀라웠다. 


'아가씨'안에 얼마나 많은 함의가 들어있는지. 허어. 난 그냥 옛날 분들이시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호칭만 그런게 아니라 그 호칭 안에 젊은 여자 이상의 뜻이 있는 거였다. 등허리를 딱 만지는데 거기서 '그럴 수 있지'가 펑 터졌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세상엔 많은 차별과 혐오가 있고, 젊은 여성으로서 이것저것 겪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어떤 겉치레라는 게 있다. 정말로 그러면 안 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면 안 되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그보다는 겉치레 예의를 한다. 하지만 당구장은 그런데가 아닌거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의 그 태도는 '이런데서 일하는 여자애'라는 거였다. 요즘이 그런 세상이 아니라면서 대체 뭐가 아니라는거야? 그럼 요즘이 대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그런 세상은 아니지만 당구장 내부는 아직 그런 세상이라는 건가? 누가 되었든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된다. 난 그냥 직장 다니기에 너무 지쳤을 뿐이고 그때도 모은 돈 떨어지기는 한참 전이었는데, 정말 당장 돈이 필요한 이십대 초반 어린 친구들도 꽤 있었다. 


손님들은 어쩔 수 없이 시대에 뒤쳐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이 정말 뭐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냥 평생 그렇게 산 것임. 하지만 거기 관리자가 하는 짓거리는 딱 봐도 상습이었다. 그런 건 뒤쳐짐이라고 불러주지도 않는다. 그건 그냥 악행이다.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끝없이 말하면서... 


그 이후로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당구장만 보면 온통 성추행의 온상으로 보인다. 코로나 시대에 모여서 담배를 피우며 당구를 치는 자들, 이십대 알바 채용공고를 내는 사장, 바글바글한 사장의 친구, 돈이 필요한 어린 여성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당구 그 자체는 스포츠이지만, 당구장은 말하자면 5,60대의 피씨방이 아닌가 싶다...


롤은 엄연한 이스포츠이고, 페이커는 정말 멋지지만... 롤 하면서 부모님 안부 찾고 게임 던지고 남 탓 하는 그런 사람들이 뭐 스포츠맨은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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