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투(1)

아무개 아니고

by 꿈쟁이

넘버투! 대장한테 덤비면 안 돼.
그래서 넌 넘버투야.


기어이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주고야 말았다.

<'꼬꼬네 살구나무에 눈이 내린다'의 일부, 장지 위에 유화물감 2025>

2021년의 끝을 며칠 앞둔 그날은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척척 눈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만큼 습기를 잔뜩 머금은 무거운 눈이었다. 이미 발목이 파묻힐 만큼 눈이 쌓였지만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은 아직 끝은 아니라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밥은 날 좋은 며칠을 제외하면 일 년 내내 걱정이다.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자리 잡기는 했지만...

눈이 잦아들면 밥을 챙기려 했는데 안 되겠다. 밥 먹으러 온 녀석들을 허탕 치게 둘 순 없다. 가뜩이나 추운 밤을 보내야 할 텐데. 속이라도 든든해야 견딜 수 있겠지. 서두르자,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였다.

휘익~ 순식간에 누군가 내 앞을 스쳐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빼꼼 나를 살핀다. "누구니?" 녀석은 얼핏 봐도 꼬질꼬질해 보였다. 일전에도 두어 번 봤던 녀석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먹을 것이 시원찮은 모양인지 삐쩍 마르고 털은 볼품없이 푸석거렸다. "얘야, 이리 와. 밥 줄게." 내 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만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한 걸음 가까이 갔다. 그러자 '들켰구나!' 싶었던지 내밀었던 머리를 후다닥 감췄다. 그것도 잠시, 용기인지 아님 호기심인지 녀석은 모퉁이에 감추었던 몸뚱이를 아예 드러냈다. "너 내가 누군 지 알지?" 다른 아이들 밥 챙기는 것을 녀석도 봤을 것이다. 녀석은 의심을 거두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눈빛으로 거리를 두고 나를 살폈다. 나도 찬찬히 그 아이를 훑었다. 드문드문 먹색 줄무늬 옷을 입은 녀석은 어릴 적 어미젖조차 여의치 않았던지 꼬리가 뭉뚝하다. 다행이다, 왼쪽 귀의 끄트머리가 잘렸다. 중성화 수술이 되었구나. 솔직히 낯선 고양이의 출현은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먼저다. 하나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닐 백 속에서 캔 하나를 꺼내 접시에 먹기 좋게 담아 녀석에게 건넸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목적했던 대로 아이들을 챙기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녀석을 만났던 그곳에는 눈 덮인 빈 접시만 남았다.


살구나무의 봄, 나무 패널 위에 유화물감, 2025

사람 아닌 동물에게는 물조차 귀한 계절... 시리고 시린 슬픈 겨울이 가고 여기저기 초록이 삐죽빼죽 눈부신 햇볕이 좋아 죽겠는 봄이 왔다. 덩달아 나도 신난다. 몸도 마음도 가볍다. 물이 얼었을까 하는 걱정도, 겨울집에 핫팩을 넣을까 말까 하는 망설임도, 폭설에 사료가 젖었을까 하는 염려까지 모두 끝이다.


물 오른 나뭇가지 사이로 밀려드는 봄볕에 가르랑거리며 노곤노곤 늘어진 녀석들은 잘 먹어 부른 배가 행복하다. 천국이 별 건가 싶다. 할 수 있으면 노래라도 부르련만 그러지 못해, 나에게 연신 두 눈을 꿈뻑꿈뻑하며 추파질 한다.


찌릿~ 눈이 없는 뒤통수가 뭔가를 본 모양이다. 뒤를 돌아 살펴보니 멀찍이 영산홍 덤불 뒤에 숨어 아이들을 챙기는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 그 녀석이다. '너도 무사히 겨울을 났구나. 잘 되었다. 다행이다.' 몸을 숙여 천천히 녀석이 숨은 덤불 앞으로 먹을 것이 담긴 접시를 가져갔다. 아직은 너도 나도 완전히 마음을 트지 못하는 상태인지라 최대한 조심 또 조심한다. 접시를 놔두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관심 없는 척 짐짓 딴청을 부려본다. "고롱고롱음냐냐옹...냠냠냠" 소리까지 내는구나. 입에 맞는가 보다. 빈 접시를 챙기며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내일 또 이 시간에 와라. 밥 줄게."


믿거나 말거나 녀석들은 시계가 없어도 때를 안다. 제각각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도 때가 되면 모여든다. 오늘은 꼬리 짧은 녀석도 늦지 않고 무리에 합류했다. 예상대로 수컷이다. 그새 내가 탐이 나나 보다. 바닥에 머리를 문지르며 우락부락한 모습에 걸맞지 않은 애교를 부렸다. 어쭈! 한 술 더 떠, 대장으로부터 나를 빼앗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내 정강이에 번팅을 하며 부비대는 대장과 다른 암컷 고양이 설이, 이 둘을 몰아내고 자기가 부비고 싶은 것이다. 녀석의 도발에 겁 많은 설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치는 것을 택했고 대장은 맞섰다. 역시나 녀석도 다른 곳에서는 짱 먹었던 솜씨다. 얼굴을 서로 마주한 채 몸을 낮추어 경계하면서 작게 으르렁거렸다. 둘 사이에 내가 있다. 솔직히 나도 무섭다. 별일 없을 거라 믿기엔 이 녀석과 함께 한 시간이 아직은 부족하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다. 둘 중 누구도 다쳐서는 안 된다. 뒷짐을 지고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춘 나는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목소리로 녀석과 대화를 시작했다.

“안돼, 이곳은 대장의 영역이야. 대장이 너를 받아주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해. 너는 오늘부터 넘버투야. 절대로 대장을 넘어서서는 안 돼."


그렇다. 대장은 우리 아파트에서 가장 수고하는 고양이다. 소문에 의하면 어렸을 때는 그렇게 천방지축일 수가 없었단다. 누군가 고양이들에게 밥이라도 좀 줄라치면 언제 나타났는지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훼방 놓기 일쑤였단다. 그래서 미움도 샀더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대장이 많이 어렸던 거 같다. 누구 말마따나 똥오줌 못 가리는 천둥벌거숭이었나보다. 그러던 녀석이 좀 컸다고 우리 아파트를 지킨다. 외부에서 낯선 고양이가 들어올라치면 죽자고 쫓아가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혼쭐 내는 기특한(?) 녀석이다.

“대장, 그만 따라가. 위험해. 밥은 넉넉하게 놔둘게. 그냥 좀 먹게 둬." 타일러 보지만 대장의 모습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그런 대장 덕분에 2020년 여름 별이 사건 이후로 더 이상 고양이 개체수가 증가하지 않았다. (별은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새끼 키우느라 배곯은 어미 고양이다.) 게다가 의리도 있어서 구내염으로 오랜 시간 고생했던 샘(설이의 언니)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고양이다. 샘이 가고 두어 달 대장은 잘 먹지도 않고 놀지도 않고 넋 놓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 모습에 대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맘 아파했다.

<cat of cat, 나무 패널 위에 유화물감, 2025>

그래서 말을 알아듣더냐? 물으면 대답은 "빙고".

대장과 넘버투 사이에 큰 다툼은 없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넘버투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장과도 모종의 교감이 있었던 거 같다. 둘은 순서를 정해 번갈아 내 정강이에 앙앙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넘버투'라는 이름도 곧잘 알아듣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주민들이 이따금씩 물었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꼬맹이들도 물었다. 왜 넘버투냐고... 나의 장황한 설명에 그들은 모두 웃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우락부락한 넘버투도 제법 괜찮은 녀석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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