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었을까?

시선 가는 대로 마음 가다

by 꿈쟁이

운명 같은 거? 어쩜 그럴지도 모른다.

그날 그 아이를 보게 된 것 말이다.

2020년 6월 언젠가로 기억한다.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지어진 때가 제법 아득한 아파트, 1층인 우리 집은 거실 큰 창과 접해 있는 뜨락 덕분에 정원 딸린 단독 주택 같다는 착각을 종종 하게 된다. 거실 안에서 밖을 내다볼 때면 말이다. 인적 드문 뜰에는 키 작은 덩굴나무들과 과실이 열리는 산수유나무, 감나무, 키가 큰 자귀나무, 벚나무, 느티나무까지 제법 많은 수종의 나무들이 서로를 의지해 살고 있다. 나무 아래, 땅에서는 누가 심은 것도 아니고 그러라 시키지도 않았건만 스스로 날아든 풀씨들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길러내고 결국에는 팝! 하고 꽃을 피워 꽃 천지를 만드는 기특한 일을 벌인다. 매년 하는 전지 작업에도 어린 초록이 제법 짙어져 튼실해질 무렵이면 벚나무와 느티나무의 우듬지는 높고 파란 하늘 속에 깊이 박혀 아예 보이지 않게 되는데, 그래도 얼마나 높을까 가지 끝을 헤매다 보면 부서진 햇살이 내 눈에 박혀 한참을 반짝거렸다. 아파트에 살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처음 이 집에 오던 날 떨궜던 눈물이 새삼 민망하다.

2025. 장지 위에 유화물감, 마법사가 사는 숲


아마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오락가락 장맛비 사이로 새초롬하게 드리운 햇빛이 초록 잎에 머무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을 터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불면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밤 잠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며 친정에서 내게 부담 지웠던 문제도 말끔하게 해결되었고 내가 하는 일도 어려움 없었기에 마음이 여유로워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품이 너그러워지면 보이는 것도 많아질 테니 말이다.

풀섶 사이사이, 이 바위에서 저 바위 위로 명랑하게 뛰노는 새끼 고양이들을 보았다.

그보다 한참 앞선 어느 해 겨울 이른 아침, 눈 쌓인 것을 구경하려고 창가에 섰다가 눈뭉치 마냥 하얀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보기도 했었다. 온통 하얗기만 한 눈 위에 콕콕 찍혀 있는 발자국이 어찌나 귀엽던지. 빨간 열매 매달린 산수유나무를 오르내릴 때는 가는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쏟아져 내렸다. 대충보아도 발목이 푹푹 빠질만큼의 눈이 쌓였는데 어미는 온데간데없고 어린 새끼들만 신났더랬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이쁘게 보았다. '귀엽네, 그런데 쟤들은 뭐 먹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수가 있겠거니 했다. '어떻게든 살겠지.' 하고 말이다. 그리고 잊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알록달록 색깔도 제각각인 고양이 네 마리. 한 마리가 조금 크다 싶어 '잘 먹었구나.' 했는데 바로 우리 집 턱밑까지 다가 온 녀석들을 보니 몸집이 조금 더 큰 녀석이 어미였구나 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어머나, 어미가 너무 말랐네. 새끼들을 저렇게 말끔하게 키워내느라 어미는 배를 곯았을까?'

나도 어미여서 그랬을까? 그 모습이 가슴에 콱 박혔다.

'어떻게 하지? 무엇을 먹으려나, 아... 몰라 몰라...'

몇 번이고 떨쳐내려 손사래를 쳤지만 너무 불편했다.

결국, '고양이가 먹는 것'을 검색하고 마땅한 것을 찾기 위해 냉장고를 뒤적거려 닭가슴살을 꺼내 삶았다.

잘 삶아진 닭가슴살을 먹기 좋게 쪽쪽 찢어 접시에 담아 밖으로 나갔다. 아 참, 거실 창으로 나갈 수는 없다. 창을 통해 뜰을 볼 수만 있을 뿐이다. 집 앞 뜰로 가려면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108동 끝의 모퉁이를 돌아 다시 거슬러 와야 한다. '그사이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낯선 사람이 주는 것을 먹기는 할까?' 하는 걱정을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자 큰 바위 위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고양이 가족이 보였다. 역시나 내가 다가가자 녀석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어쩌지?' 뻘쭘해진 나는 녀석들이 쉬고 있었던 자리에 접시를 놓아두고 집으로 되돌아와 창을 통해 그들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끼들이 하나 둘 그릇 주변에 모여들었다. '먹을까?' 하는 나의 걱정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너무 잘 먹는다. 딱 한 녀석만 빼고 말이다. 어미는 단 한 입도 먹지 않았다. 삐쩍 마른 어미는 새끼들이 먹는 내내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경계할 뿐이었다. 그 모습이 더 아팠다. 곧 일 할 시간인데… 콩닥콩닥 심장이 다시 바빠졌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남은 닭가슴살을 마저 삶았다. '제발 먹어라.' 하면서... 하지만 어미는 먹지 않았다.

'세상에... 세상에... 어쩜 이럴 수가.'


그렇게 나는 캣맘이 되었다.

새끼들 클 때까지만

그래서 어미가 건강해지면 그만둘 것이라

굳게 다짐하면서…


딱 거기까지만...

2025. 나무판 위에 유화물감, Adore Me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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