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그녀

나를 좀 봐요

by 이경아

볼품없이 삐죽 솟은, 꽃잎 없는 꽃대에 와글와글 달린 서툰 분홍색이 볼 때마다 우스웠다. 따라쟁이 꼬마가 치덕치덕 연지를 처바른 입술을 삐죽이며 엄마의 화장대 앞에서 우쭐하는 모습과 닮았다. 그 꼴을 하고서도 성에 차지 않는지, 별 거 없는 엄마의 옷장에서 하나뿐인 꽃분홍색 명주 스카프를 꺼내 허리에 휘감아 야무지게 여미고 거울 앞에 섰다. 기왕 내친김에 '한 번만 신어봤으면' 소원했던 엄마의 뾰족구두를 꺼내 신고, 이리 씰룩 저리 씰룩 어설픈 끼를 부린다. 가을에 꽃인척 사부작거리며 흔들리는 너와 딱 닮았다. 어디서 그런 쨍한 분홍색을 얻었는지, 제 딴에는 이쁘게 꾸민다 한 것이겠지만 튀어도 너무 튄다. 그 꼴로 가을 들판, 언덕배기, 길가 여기저기를 도발한다.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 누가 너에게 홀릴까 했는데, 이런... 내가 넘어갔다. 주변의 어떤 것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존재를 주장하듯 도드라지는 색깔이 볼 수록 매력적이다.

푸훗! 아무래도 내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나 보다.

<코튼지에 연필과 수채화물감, 분홍빛 스카프를 두르고 >

대개는 붉음이 희석된 화사한 파스텔 톤의 귀여운 색을 떠올리겠지만 그의 분홍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딸기 우유의 보들보들한 분홍을 생각하면 안 된다. 꼭 따지고 들자면 내 물감 팔레트의 '오페라'와 가깝다.

높은 채도의 밝고 강렬한 분홍 형광펜이랄까?

다분히 불온하다.

처음부터 유혹할 작정이었으니까.


이 꽃은... 음... 꽃잎이 없는 꽃이다. 그래서 꽃이라고 해야 하나 망설여지지만 벌이며 작은 곤충들을 꾀기엔

아쉬울 것 없다 하니 꽃인 셈 치자. 가을 내내 꽃잎 없는 꽃을 와글와글 매달고도 당당하게 끼 부리는 풀친구, 매혹적인 핫핑크의 그녀가 바로 '개여뀌'다.

'여뀌'에 비할 바 아니라는 의미로 접두사 '개'를 붙였다. 뭐 '바보여뀌'도 있으니 그보다는 낫겠다 싶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흔한 여뀌가 너로구나'라는 의미라 여기면 여뀌들 중 가장 번성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뭐라도 제대로 차려 놓고 손님을 청할 것이지"

하며 눈을 흘기자,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혀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 짧은 생인데 굳이 힘들게 살 필요가 있을까?"

생김만큼이나 간드러진 목소리로 능청스레 웃으며 외려 되묻는다. 그 물음의 답을 찾고자 차근차근 그녀의 행적을 살폈다.

<코튼지에 연필과 수채화물감>

마디풀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개여뀌는 먼저 살고 떠난 개여뀌가 퍼뜨린 씨앗에서 봄을 기다려 싹을 내고는, 조심스레 살피다가 완연한 여름 본격적으로 키를 키운다.(20~50cm) 한여름부터는 줄기 끝이나 잎겨드랑이에서 실처럼 가늘고 긴(15cm 정도) 이삭 모양의 꽃차례를 뻗어 올린다. 처음에는 작은 녹색 알갱이들이 줄지어 붙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가, 꽃 피울 시기가 되면 성숙해진 녹색 알갱이가 분홍색을 띠면서 물 오른 꽃봉오리처럼 점점 부풀어 오른다. 이윽고 다음 세대를 위해 스스로를 끝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곤충들의 힘을 빌고자 꽃봉오리에 작은 틈을 낸다. 꽃잎이 없기에 활짝 필 수는 없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꽃받침 사이로 암술과 수술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그녀는 꽃잎은 생략하고 대신에 갈라진 꽃받침을 화려하게 만들어 꽃인척 한다. 아주 적은 양이지만 함께 즐기라고 달콤한 꿀도 준비했다. 그렇게라도 꽃인척 피우는 것은 그 많은 꽃봉오리들 중 극히 일부다. 나머지는 아예 피지도 않고 "앞으로 필 거야." 하며 가을 내내 거짓으로 유혹한다. 꽃받침의 화려함에 '꽃인가 보다' 홀리고, 감질나는 꿀에 취한 곤충들은 바삐 날며 그녀가 원하는 수분을 기꺼이 해준다. 수정이 끝나면 꽃잎인척 갈라졌던 꽃받침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모아 닫힌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작지만 단단한 꿈을 품은 씨앗이 자란다.


대단하구나. 그렇게 곤충들을 꾀는구나.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어렵게 살 필요 없다면서, 피지 않는 꽃봉오리들은 뭐 하려고? 그거 만드느라 힘들었을 거 아냐."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곤충이나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할 수 있어."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스로 할 수 있다니 뭐를?"

"나는 자가수분을 할 수 있다고. 닫힌 꽃봉오리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아냐."


그랬다. 닫힌 꽃봉오리 안에서는 암술과 수술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는 상태인 데다가 꽃이 작고 가볍기 때문에 바람이나 비 등의 작은 흔들림에도 쉽게 꽃가루가 떨어져 암술머리에 닿을 수 있었다. 오히려 곤충이나 바람에 의한 수분보다 자가 수분이 훨씬 더 많단다.


<내가 사는 아파트 곳곳에 개여뀌의 진분홍이 화려하다>

"난 말이야, 누군가 날 찾아주었으면 하고 애태우지 않아."

"어이가 없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네 스스로 하지 그랬어. 나를 봐 달라. 생각 좀 해달라. 그럴 때는 언제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분홍 립스틱 짙게 바른 그녀의 꽃말은

'나를 생각해 주오.'였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그녀가 또 한 번 웃었다.

그러더니 내게 바짝 다가앉으며 도발했다.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랐잖아."

배시시 웃는다. 엉큼하다.

"너한테만 말해줄게."

귀엣말하듯 속삭이더니, 기막혀하는 내 표정을 보고는 데굴데굴 구르며 배를 움켜쥐고 웃는다.


<코튼지에 연필과 수채화물감, 직접 찍은 개여뀌의 꽃 사진 일부>


화려한 분홍색과 꽃인 척하는 위장으로 꾀는 것에만 능한 줄 알았는데 그렇게 지혜로울 수가 없더라.

그녀는 예민하게 환경을 살필 줄을 알았다. 그래서 날이 좋아 곤충들이 활발해지면 한층 더 진해진 꽃을 열어 그들의 방문을 기다린다. 열린 꽃의 수도 많아지고, 꿀도 더 많이 만들어 준비한다. 그때뿐 아니라 물이 부족한 건조한 날씨나 경쟁이 심해질 때, 토양에 질소가 많아져 스트레스가 높아질 때 역시 꽃을 열어 타가수분을 시도했다. 자가수분이 야기할 근친의 위험을 피해 다른 개체의 다양한 유전자를 받아들여 더욱 강해지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 즉, 흐리거나 비 오는 날, 곤충들의 방문이 뜸해지는 날, 스트레스 없는 날에는 그보다 수월한 자가수분을 선호한다. 이러한 혼합수분 전략으로 그녀는 다양한 환경에서도 효과적으로 개체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도발에 매료되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래서 길가, 논둑, 들판, 화단 가릴 것 없이 가을 내내 여기저기 진한 분홍색이 흔들린다.

'개여뀌가 맞네.'


<코튼지에 연필과 수채화물감, 도깨비를 물리칠 거예요>


개여뀌가 꾀는 것은 나와 곤충들만은 아니다. 도깨비들도 그에게 홀딱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다지.

문 앞의 여뀌는 도깨비를 물리친다나?

여뀌의 꽃봉오리가 몇 개나 되는지 헤아리는 것에 정신이 팔린 도깨비는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아뿔싸! 또 당했네 했을 게다. 도깨비를 '엮기게 한다'라는 말에서 '여뀌'라는 이름이 유래했을 거라 하니 개여뀌에 넘어간 내 꼴이 그리 우습지는 않다. 심지어 물고기조차도 개여뀌에 반응했다니 그저 유쾌할 따름이다. 개여뀌의 잎과 줄기를 찧어 물에 풀면 물고기의 움직임이 둔해져서 '어독초(漁毒草)'라 했다는데, 옛사람들의 말을 믿고 실제로 그리 하지는 말자. 물고기에게 약간의 자극을 주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치명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이를 대량 투입하는 행위는 수질 오렴, 생태계 교란, 불법 어획등 무시무시한 죄목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코튼지에 연필과 수채화물감, 한밤중의 낚시>


그녀는 "이렇게 살 거야. 이 방법이 내게 맞아." 하는 따위의 고집이 없다.

그저 처한 상황을 살펴 유연하게 대처할 뿐이다.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다음 세대의 번영과 안녕'이다.

'마디풀과 식물'인 개여뀌의 굵은 마디 역시 '다음 세대의 번영과 안녕'을 돕는다. 개여뀌의 마디를 감싸 쥔 얇은 막 '턱잎'은 마디로부터 새로 올라오는 어린 줄기와 잎의 안전을 지킨다. 보호막이다. 생장점이 상하지 않도록 해주고, 수분보호는 물론 병충해도 막아준다. 그러고 보니 개여뀌의 굵은 마디는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워 낸 옛 어머니들의 툭 불거진 손가락과 닮았다. 촌스런 분홍빛 또한 학교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날, 자식들 면(面) 깎이지 않게 하려고 한껏 꾸민 그 모습 같아 코끝이 찡하다.


<관찰을 위해 개여뀌 한 뿌리를 집으로 가져와 살폈다>

꼬리 치는 분홍빛에 넘어갔구나 했는데, 고집하지 않고도 잘 살아내는 개여뀌의 속마음을 알고 나니 그녀를 놀린 것 같아 미안해졌다. 삶의 문제는 오지선다형 문제도 O.X 문제도 아니다. 오늘은 옳았지만 내일은 그를 수도 있고 또 오늘은 여의치 않았지만 내일은 가능할 수도 있다. 목전에 겨눠진 칼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칼은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네게 홀렸던 것은 행운이었구나.

나도 너처럼 요염하게 잘 살아볼게.


<코튼지에 연필과 수채화물감, 꼬맹이들의 소꿉놀이 재료였던 개여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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