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는 아니잖아!

꼭 똑같게 그릴 필요는 없어

by 꿈쟁이
혼자 하는 일은 자신에게 좀 더 엄격해야 한다.


누군가의 관리를 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통제하는 모든 일은 좀 더 엄격하고 치밀해야 한다.

자꾸만 자신을 용서하기 시작하면 애초의 결심은 산산조각 날 테니 말이다.

반드시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 아니면 정해진 매수만큼 그림을 그린다라는 식의 양적 측면만의 실천은 어느 순간 물량 채우기 식으로 변할 수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일명 "깜지" 또는 "빽빽이"라고 불리는 매일매일의 과제가 있었다. 주요 과목은 거의 예외 없이 B4사이즈 크기의 갱지 1장 분량을 매일매일 과제로 제출해야 했다. 공부를 위해 깜지가 있는 것인지 깜지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의 경계가 애매해질 즈음 급기야 각종 편법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먹지를 한 장 받치고 깜지를 쓰는 것이다. "일타쌍피". 오늘 하루의 고생으로 내일 깜지까지 끝낼 수 있다. 어떤 친구들은 볼펜 두 자루를 들고 깜지를 쓴다. 특히 영어 깜지를 쓸 때 이 방법은 딱이다. 영어 깜지는 대부분 영어 단어를 반복해서 쓰거나 문장을 쓰는 것이다. 빽빽하게 같은 단어를 수십 번씩 반복한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한 번에 여러 자루의 펜을 들고 쓰는 것이 효율적이다. 어차피 선생님은 그 많은 깜지를 세심하게 살필 수 없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을 땐 깜지를 거래하기도 한다. 친구에게 떡볶이 사주고 구하기도 하고 서로 빌려주기도 한다. "의리"로 똘똘 뭉친 친구들이다. 매일매일 그림 그리는 일을 깜지와 비교하는 것은 너무 나간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타성에 너무도 쉽게 젖어드는 존재다. 타성에 빠지면 더 나아짐을 기대하긴 어렵다. 깜지가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까닭은 깜지의 효용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깜지를 쓰는 우리의 자세 때문이었다. 수학 문제를 직접 고민하여 풀지 않고 풀이집을 보고 베꼈기 때문에 고등학교 3년 내내 깜지를 생산해냈지만 대부분은 수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머릿속을 가볍게 비우고 별 고민 없이 그저 계획한 시간만큼 계획한 도화지 매수만큼 그림을 그리는 나를 보고도 "수고했어 오늘도." 하면서 아무것도 나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면 나아짐을 기대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리려 애썼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묻기로 했다.
일상이 절로 흘러가게 두지 않기로 했다.



변화는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두려움이기도 하다. 자꾸 무언가가 잔잔한 수면을 흔들어 파장을 만든다면 그 무언가가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라고 미리 예상했더라도 말이다.


가능한 사진과 똑같이 그리고 싶었다. (아이패드로 그린 디지털드로잉)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자꾸만 똑같이 그려야 한다라는 강박에 시달렸다. 사실과 같은 그림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그림이 진짜처럼 보이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수시로 확인했다. 그런다고 그림이 진짜가 될 수 없는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물론 극사실주의를 따르는 그림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사진을 복사 하 듯 옮기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처음부터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그림을 의도하고 그린다.

하지만 나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별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없어서 단순히 똑같이만 그리려 애쓰는 것일 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통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그런 것을 가리켜 재능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안타깝게도 보통사람이다. 사물의 색이 다르게 보이지도 않고 형태가 뒤틀려 보이지도 않는다. 무릎을 탁 치며 탄복하게 만드는 재차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지극히 평범하다. 즉, 타고난 무언가에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란 말이지.

그래서 난 노력하기로 했다. 틀리는 것을, 잘 못 그리는 것을 의도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어 감정이 널을 뛰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노력해보기로 했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이런 노력은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 그대로 그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분명 느리지만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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