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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쟁이 Dec 11. 2022

저건 분명 시어서 못 먹을 거야!

여우는 현명했다

어느 화창하고 좋은 날 여우 한 마리가

숲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 잘 익어 먹음직한 포도를 발견했다.

"맛있어 보이는 포도군."

여우는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여러 번.

계속되는 시도에도 포도에 닿을 수 없었다.

결국 여우는 돌아서기로 마음먹었다.

"맛있어 보여서 따 먹으려 했는데 지금 보니 신포도군.

먹지 못할 포도야."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합창단을 모집했다.

어린이 합창제도 나가도 방송국에도 나갈 거라 했다.

뭐든 해 보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나는 부모님의 동의 여부를 물을 새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선발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반에서 몇 명 지원을 받았을 테고

지원자들은 약간의 테스트를 거쳤을 것이다.

나는 이미 초등 1학년 때부터 누가 해보라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두 손 번쩍 들고 웅변대회를 나갔던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소유자다.

무난히 테스트에 통과했고

더듬더듬 눈치로 악보를 읽어내면서

매일 오후 언니 오빠들과 함께 연습을 했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노래.


꼬부랑 할머니가(꼬부랑)

꼬부랑 고갯길을(꼬부랑)

꼬부랑꼬부랑 넘어가고 있네

꼬부랑꼬부랑

꼬부랑꼬부랑

고개는 열두 고개

고개를 고개를 넘어간다


즐거운 날들은 정녕 계속될 수 없단 말인가.

드디어 그날이 왔다.

얼마 안 있어 대회가 있다고 했다.

단복을 맞춰야 했다. 단복은 정말이지 너무 이뻤다.

자줏빛 도는 빨간 벨벳 마이에 짙은 남색 벨벳 스커트.

벨벳은 정말 환상적인 옷감이다.

이것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으면 금방이라도 동화 속 공주가 될 것만 같았다.

벨벳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나에겐 판타지이다.

결혼 예복 역시 검은색 벨벳이었으니까.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단복이 또렷한 것을 보면

그때의 난 그것을 간절히 원했음이 분명하다.

매일 밤 꿈을 꾸었을 것이다.

차르르 빛이 흐르는 보드라운 빨간 벨벳 단복을 입은

나의 모습을.

하지만, 두근두근 설레며 뛰어대는 나의 심장과는

별개로  나의 머리는 신호를 보냈다. 불가능하다고.


열 살 꼬마는 꽤나 야무졌다.

다섯 살 때부터 엄마의 콩나물 심부름을

야무지게 했던 아이다.

심부름을 보내면 내가 꼭 주인아주머니와

흥정을 하더란다.

깎아주세요. 조금만 더 주세요.

그래서 동네 어른들이 껄껄 혀를 내둘렀던

키 작고 깡마른 아이.

당연히 열 살 아이의 눈치는 남달랐다.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없었다.

합창단을 하는데 단복을 맞춰야 하고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차마 옷을 맞추어 달라고 조를 수 없었다.

방법은 내가 합창단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그만두는 이유가 합창단복을 살 돈이 없어서인데

돈이 없어 그만두어야 한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열 살 꼬맹이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부끄러움이었다.

나 말고 이런 이유로 그만두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흘렀다.

매일 메일 조마조마 두근두근.... 불안한 날들이었다.


마침내 나는 그 지옥에서 해방되었다.

어린 나는 잘 몰랐었는데 그 무렵 부모님은

이사를 계획하고 계셨다.

전학을 가야 했던 거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진짜 전학을 갔다.

얼마 안 되는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타고.

그러니까 내가 합창단을 그만두는 까닭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사를 가서이다. 학교를 옮겨야 했기에 합창단은 할 수 없는 것이고 단복도 맞출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어찌나 마음이 편하던지.

일이 해결되고 나니 날아갈 듯 가벼웠다.

합창단 따윈 미련도 남지 않았다.

이따금 꼬부랑꼬부랑 화음이 귓전을 때릴 따름이다.

그리고 도도한 빨간색 벨벳 단복이 눈앞에 아른거릴 따름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로

돈이 필요한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단체복을 맞추는 활동은 더더욱.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라는 옛 말의 의미를 일찍이 깨달았기에.

어쩌면 나의 삶은 이솝우화 '여우와 신포도'에서 여우가 보였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합리화라고 또는 비겁하다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래서 살 수 있었다.

그걸 얻기 위한 추가적인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았기에

남은 힘으로 그것 없이도 살 수 있었다.


스스로의 삶을 살면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돈은 꿈꾼다고 가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간절히 열망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원할수록 늪에 빠질 수 있음을.


꽤나 나를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봐 왔다는 지인들 중엔

이따금 나를 비웃는 이들도 있다.

열심히 사는 내가 아등바등 사는 거 같아

징그러운 모양이다.

미술을 전공하고 유럽으로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그래서 모 대학에서 조교인지 강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강의도 했다는 지인이 신랄하게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죽어보라고 휘두른 칼이니 섭섭지 않게 해 줘야겠지.

딱 이틀 참 많이 아팠다. 딱 이틀....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분주하게 최선을 다해 살았기에

지금껏 살면서 돈에 무릎 꿇은 적 없었고

권위에 빌붙은 적 없었습니다.

돈 많은 누군가가 나를 봐주길 구걸한 적 없었습니다.

내게 합당한 대가 외에 그 이상을 탐낸 적 없기에 항상 당당했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내게 타임슬립의 기회가 있어

다시 살게 된다 해도 똑같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열심히 살아낼지도 모르겠다.

몸은 고되었지만 마음만은 천국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에게 그림은 사치가 맞다.

얼마 전에 쓴 글처럼

나에게 그림 그리는 시간은 분명 사치하는 시간이다.

기본기가 있든 말든

내가 십 원짜리 그림을 그리든 말든

생각이 보이든 말든

그 시간은 늘 "저건 어차피 시어서 못 먹을 거야"라며

씁쓸하게 돌아서야 했던 내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다.

그러니 그려라 마라... 할 일이 아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당신네들의 고결함을 흉내 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올여름 아들 방에 있던 스무 해 넘게 사용했던 공간박스를 치웠다. 그냥 스티커 붙여 내놓을까 하다

비록 MDF지만 나무로 만든 것이기에 그냥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일일이 분리해서 한쪽에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러다 그림이라도 그려봐?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여섯 번째 그림책의 캐릭터를 그려보기로 했다.

MDF 패널 위해 아크릴 물감과 색연필을 이용해서 배경 그림을 그렸다.

젯소 칠을 먼저 하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집에 젯소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아크릴 물감으로 칠해야 했다.

스케치 북을 한 장 떼내어 수채와 물감과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가위로 오렸다.

종이 인형 놀이의 추억이 새록새록 올랐다.

정성껏 색칠한 MDF 패널 위에 높이를 달리해서 그림들을 붙였다.

며칠 동안 틈틈이 그렸다. 가로 세로 30cm 크기의 그림이 내 나름 이뻤다.

입체감이 있는 그림이다 보니 훼손을 막으려면 액자가 필요했다.

주변에 액자 할 만한 곳이 있을까 싶어

미술 하는 지인을 만날 기회가 있어 물었다.

"혹시 근처에 그림 액자 할 곳이 있을까요?"

"음... 여긴 없어요. 서울에 가야 해요."

"아... 예..."

"제가 하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하는 곳이에요.

지난번 전시 때 200만 원 달라해서 조금 저렴한 곳으로 가서 100만 원 주고 했어요."

그분이 말하는 작품의 크기가 꽤 크긴 하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일단 그림은 수납공간 한편에 종이 봉지에 담아 잘 보관하고 있다.

마땅한 액자를 만나면 그때 넣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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