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접 온 고양이(마지막 이야기)
12월 마지막주 수요일 우리 집에 왔던 까미는
1월 첫째 주 수요일 병원 진료를 끝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까미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시죠? 어머님도 함께 가세요. 제가 차를 가지고 집 앞으로 갈게요. 나오세요." "아니 나는 안 갈 거예요. 그동안 그 언니가 다 해주었는데, 이번에도 그러면 안 돼요?"
그 언니는 B를 말하는 것이다. "그분이 퇴근해서 가려면 너무 늦어요. 그분은 차도 없어서 또 다른 사람 불러야 하고요. 이번에는 제가 가 드릴 테니 함께 가세요."
그는 자꾸만 내뺐다.
"까미 보호 자니까 직접 보셔야지요. 수술 부위 아직 못 보셨죠? 좋아지고 있는지 의사 선생님 말씀도 직접 들으셔야죠. 보호자로서의 책임도 보여주셔야죠."
결국 그녀는 강하게 권하는 나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함께 병원에 갔다. 까미를 입양한 지 2개월이 넘었지만 아직 이동장조차 마련하지 않았기에 나의 고양이 아라의 이동장에 까미를 넣어 데려갔다.
의사 선생님이 진료하시는 동안 내내 내가 까미를 잡아주었다. 불편했을 그 모든 과정을 까미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그저 믿고 의지했다. 입질 한 번 하지 않았다. 다행히 까미는 빠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선생님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실밥은 일주일 뒤에 풀 수 있다 했고 여전히 매일 해 줘야 하는 소독과 하루 두 번 먹이는 약도 변함없었다. 병원비 결제는 B가 해주기로 했단다. 이번까지만.
병원을 나와 주차된 차로 이동하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가 사는 게 넉넉해서 이 모든 것을 부담했던 게 아니에요. 까미의 입양과 관련되어 우리 셋은 각각 40여만 원 넘게 부담했어요. 저마다 각각의 사정이 있는 우리였지만 가여운 아이를 입양하신다 하기에 너무 기쁘고 고마워서 기꺼이 보탰던 것입니다. 까미와 보리를 키우겠다 마음먹으셨다면 책임을 다해주세요."
그렇게 까미는 까미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또 바리바리 싸서 보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실밥 풀으러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다. 별 다른 소식이 없어서 함께 사는 아들과 병원에 가려나? 했는데 아니었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또 B에게 전화했다. 나에게 연락하는 것이 미안했던 B는 A에게 연락해 까미의 병원 동행을 부탁했다. 요즘 퇴근이 늦어져서 시간을 맞출 수 없다고.
결국 A는 자신의 일을 미루고 병원 동행에 함께 했다. 다행히 까미는 많이 좋아져서 실밥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삽관했던 자리에 살이 다시 차오를 때까지는 매일 소독해 주고 약도 더 먹여야 했다. 병원비를 결제해야 하는 순간 까미의 보호자는 또 머뭇거리더란다. 보다 못한 A가 "어머니, 까미 차에 먼저 실어놓을 테니 병원비 결제하세요."라고 말하며 그 상황을 넘겼다고 했다. 까미의 보호자의 나이가 우리와 열 살 남짓 차이 났을 뿐이지만 달리 마땅한 호칭이 없어 그냥 어머님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그래서였을까? 우리의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게 된 까닭이.
다음 날 까미의 보호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언니들 덕분에 까미 많이 좋아졌어요. 언니들이 도와줘서 너무 좋아요."
난 조금 긴 답글을 보냈다.
"네, 다행이에요. 사랑으로 키워주세요. 우리나라 고양이는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들여왔대요. 그 당시 불경을 목판에 새겼는데 그걸 쥐들이 갉아먹는 통에 불경을 지킬 목적으로 고양이를 데려왔대요. 현재 우리나라의 고양이는 그 후손들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지켰던 아이들입니다. 정성껏 키워주세요. 필요한 물품도 구입해 주시고요."
자신이 불교 신자라고 그래서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노라 내게 말했었다.
내가 자주 보는 YouTube 채널의 한 수의사가 그랬다.
"내가 반려동물을 키워도 되나? 그럴 수 있을까?"하고 헷갈린다면 동네 동물병원 수의사와 상담하라고.
함께 살아보면 알게 된다.
사람이 아닌 동물이지만
사람과 교감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거기에 공부를 하면 더 잘 알게 된다.
그들이 사람의 감정과 생활 패턴까지 모방한다라는 것을.
사람처럼 구시렁거리며 때론 엄살 부리며
여기저기 아프다 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들도 때때로 아프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아픔을 끙끙 참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 아닌 동물들이
용가리 통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밥 주고 따뜻한 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프면 치료해 주고 미리 예방해 줄 수 있으면
예방적 처치를 해주어야 한다.
때문에 반려동물과 함께 하면서
가장 부담스러운 것이 병원비일 수 있겠다.
의료보험 시스템에 의지할 수 없기에
온전히 보호자가 부담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반려할 수 있나 없나 체크해야 하는 사항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이 경제적 능력이다.
그래서 함부로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반려를 결정해서는 안된다.
순간의 감정으로 반려를 하게 되면
순간의 감정으로 버릴 수도 있기에.
요즘은 반려동물을 제 자식인 양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그렇다.
어떤 이들은 이런 모습을 아주 심하게 비난하게도 한다.
하지만 제 자식처럼 여겨야 극한 상황에서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는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내 것을 내어놓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키워야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사랑은 시간도 돈도 함께 내어주어야 무럭무럭 자란다.
반려 동물을 반려한다는 것은
가슴으로 낳아 지갑으로 키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