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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정 Jun 22. 2023

7+. 애도와 우울증

고양이 키우기 생각 더하기

B.C. or A.D.

Before Camembert or After (the) Death of camembert...

까망베르를 키우기 이전이거나 까망베르의 죽음 이후 이거나...


펫로스 증후군부터 반려동물의 죽음을 맞는 인간의 상실과 우울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진 바가 많다. 

나에게 고양이(까망베르)의 죽음은 가족을 잃은 상실에 맞먹었지만 준비도 안된 채 고양이를 키우고 나의 무지 때문에 고양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슬픔은 더했다. 

까망이(까망베르)의 죽음 이후 아무리 '별이 된 고양이'라든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다' 등의 표현을 쓴다 한들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죽음은 죽음이다. 아침마다 냥펀치로 나를 깨우던 까망이의 모닝콜도 없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내 옆을 비집고 들어오던 따뜻한 체온도, 꾹꾹이로 내 뱃살을 확인시켜 주던 젤리손도 더 이상 없다. 까망베르 치즈에 블루벨벳 같던 까망이의 특별한 눈도 이제는 볼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까망이의 사진을 봐도 눈물이 나지 않을 만큼이 되었지만(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다시금 까망이의 죽음 즈음으로 감정이 회귀한다.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에 따른다면 나는 애도와 우울증 그 둘에 걸쳐진 절반의 어디쯤, '우울증'을 벗어나려 애쓰면서 '애도'라기엔 아직 미련이 많은 과정 중에 있다. 점차적으로 충격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까망이의 죽음에 대한 자책과 후회가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울증'을 벗어나고자 까망이의 죽음을 소환하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처음으로 제법 진지하게 했던 것은 열다섯의 어느 날이다. 어리다면 어렸을 그 나이에 우연히 서점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표지만 보고 죽음에 대한 나름의 고찰을 시작했던 것 같다. 죽는다는 것이 뭔지, 천국이든 낙원이든 있기는 한 건지, 과연 영혼은 이 세상을 떠도는 건지 내세로 가는 건지.... 그런데 꼬리를 무는 생각이 어느 지점에 이르자, 이런 것들이 내가 내 생각을 가지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죽음으로 내가 없어진다면 생각은 멈추는 것이고 생각하는 내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연속이 없는 것이니 그것이 환생으로 이어지고 끝없는 윤회를 한다 해도 지금의 나는 여기서 멈춤! 이란것 아닌가. 그다지 자아가 강한 편도 아니었는데 지금의 나, 지금의 생각을 가진 '나'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보다 더 싫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알기도 전에 이런 생각을 했으니 대견한 발견이었지만 당시엔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 내가 열다섯에 했던 죽음에 대한 생각 이후로 다시금 죽음에 대한, 분류하자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고양이가 죽어서 그야말로 별이 되는 것은 아닐 테니 죽음 이후를 지나 까망이가 다시 환생했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다. 나의 종교적 입장과는 다르게 까망이가 다시 태어나 이왕이면 검은 고양이로, 예전처럼 턱시도냥으로 태어나 나에게 어떻게든 어디서든 발견되기를 바랐다.


어느 시공간이든 인간이 죽음 이후에 도달하는 곳 있다면 고양이도 그곳에 도달하지 않을까? 우주의 에너지 법칙으로라면 죽은 까망이의 에너지든 물질이든 그 무엇은 어디로든 갈 테고, 어디서든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지 않을까? 이건 종교적 믿음이나 신앙과는 다른 범주의 이야기다.

나의 신앙으로는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있지만 영적인 존재가 아닌 고양이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내가 죽어 천국에 갔을 때 까망이는 거기에 있을까?


종교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천국에서 만난다는(아니면 영겁의 시간을 거치며 생의 어느 자락에서 옷깃을 스치는 사이라도 될지 모른다는) 소망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대단한 위로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우리는 생령? 혹은 또 다른 의미의 존재가 되기에 지상에서의 가족이 다시 천국에서도 한집살이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한집살이을 한다 해도 별 반가운 소리는 아니지만 말이다. 천국에도 고양이는 있을 것인데(사자와 어린양이 뛰논다는데 고양이가 없을 리 없다) 까망이도 있는 것일까? 천국에서의 내가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더라도 '나'인 것처럼 까망이도 까망이지 않을까?

신학적 근거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인의 소견, 아니 궤변이랄까? 그저 반려동물을 먼저 떠나보낸 집사가 우울을 벗어나고자 해 보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까망이를 그리워하다 든 선잠 속에서 나는 까망이를 만났다. 상상이 불러온 세계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평화로운 그 세계 어디쯤에서 나는 까망이를 발견한다. 까망이는 저 멀리서 나를 보고 뛰어온다. 하지만 이내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이 거리가 사실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또랑한 눈을 내게 보이며 그리움과 미안함에 울고 있는 나를 블루벨벳 눈동자가 위로한다. 한동안 또는 잠시... 눈앞에 있는 까망이와 눈을 마주하며 전적으로 공감하는 마음의 언어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까망이의 걸음걸이, 동그래진 눈, 눈 위로 웃자라던 수염, 갸우뚱하는 귀모양도 그대로다. 나를 쳐다보며 더 가까이 와보지만 보이지 않는 이 선을 넘어오지는 못한다. 이내 몸을 돌려 저편으로 가지만 걱정인 듯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전한다.

난 지금도 좋아, 여기서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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