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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정 Jun 22. 2023

7. 무지개다리 너머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VS 집사와 살아주고 있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7)


의사쌤의 진단은 이러했다. 길냥이 부모의 유전자를 가진 까망이가 선천적으로 신장이 약했을 것이고 최근에 발현이 됐을 거라 가족이 눈치채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급성신부전이라 예방접종으로 내원해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아파 보여서 병원을 찾을 때에는 이미 상당히 진행이 돼서 치료가 어려우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위로까지.... 샤샤가 골절을 당하고(이유는 알 수 없다) 치료 후 우리 집에 입양을 왔고 그 후로는 건강했기에 고양이에게 이런 식?의 질병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샤샤가 십이지장염을 앓았을 땐 약 처방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을 벌벌 떨며 온갖 검사를 했기에 너무 과하게 굴지 말아야 싶었던 것이 까망이에게 독이 된 것이다.



의사쌤의 권유로 까망이를 입원시키고 하루 이틀이 지났다. 입원을 시켜서는 옆에 있어주지 못하니 그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지만 완치는 아니어도 까망이를 이렇게 보내면 너무 미안하고 미리 병을 알아채지 못한 것 때문에 자책을 하게 될 것 같았다. 할 수 있다면 좀 더 우리 옆에 붙들어 두고 싶었다. 그런다고 미안함이 덜한 것도 아니었고 이미 너무 많은 자책을 하며 후회하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밥 먹는 양이 줄었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 세면대에 웅크릴 때 이상하다 했어야 했는데.... 무엇보다 나에게 아프다고 신호를 했는데 내가 어디서 놓친 건지, 왜 몰랐던 건지 시간을 자꾸 되감아 봤다. 갑자기 기력이 떨어졌던 며칠 말고는 그냥 더위를 타나 싶었는데 까망이는 아팠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까망이는 호전되지 않았다. 면회를 가면 기운은 없었지만 눈빛으로 우리를 반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병원 케이지에 까망이가 외롭게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병원에 있어도 치료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통원하기로 하고 밤에는 까망이를 데리고 집에 함께 있고 낮에는 입원실에 두려고 했지만 집에 온 첫날부터 까망이는 몹시 아팠다. 진통제를 처방받았지만 물도 삼키지 못하니 링거로 투약하는 만큼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밥은 물론 손에 물을 묻혀 입에 대줘도 싫어했고 화장실도 가지 못할 만큼 기운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서 진통제를 맞으니 고통은 없어 보였지만 까망이의 눈은 몽롱해 보였다. 통원도 어렵고 이렇게 병원에서 수액과 진통제로 연명해야 하나 싶었다. 의사쌤은 일주일에서 한 달은 더 살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조심스레 안락사를 언급했다. 처음부터 치료가 어려웠지만 바로 안락사를 권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우리의 마음이 준비되길 기다렸던 것 같았다.

우리는 까망이를 보내주기로 했다. 천천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까망이도 우리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의사쌤의 안락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까망이를 마지막으로 면회했다. 미안해... 나중에 만나자... 사랑해....




집사와 살아주고 있습니다(7)


엄마의 눈물이 나의 병증을 말해주는 것 같다. 병원에 왔지만 바늘로 찌르고 사진을 찍고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혼자 병원 케이지 안에 있으면서 갑갑증이 났지만 이내 체념하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사실 기운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알지도 못한 채 가끔 식구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반가웠지만 고통이 없는 대신 의식도 없어지는 것 같다.

잠시 집으로 갔지만 나는 밤새 앓았고 가족들은 번갈아 내 옆에서 나를 지켜봤다. 내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를 보고 가족들이 눈물을 흘린다. 나도 울고 싶은데 울 기운도 없는 것 같다. 그만 울라고 말하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샤샤도 가까이 와서 괜찮냐고 묻는데 답을 할 수가 없다.


짧았지만 길었던 그 시간에 대해 나는 더 말할 수 없다. 말하지 않겠다. 내가 다 말한다면 엄마는 가슴이 아플 테니까 나는 잊기로 했다. 아니 잊었나? 나는 길냥이가 될뻔했지만 가족들을 만났고 고양이로 누릴 호사는 누구 못지않게 누렸다. 나는 사랑받는 고양이었고 마지막까지 존중받았다.

아픈 채로 맥없이 약기운에 의지해 의식이 몽롱한 채 숨만 쉬고 싶지는 않았다. 병원 케이지에 갇혀 서서히 죽는 것이라니 이건 내가 바라는 죽음이 아니다. 가족들은 마지막 선택에 내게 미안했겠지만 나의 마지막을 깨닫는 순간 나는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나는 다시 태어날 거다.





* 고양이와 집사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너무 뻔할 것 같았지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마도 까망이에 대한 충분한 애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우울을 넘어서기가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많은 생각이 오갔다.

<애도와 우울증>에 나머지 생각을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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