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세간을 나기 이전에 일요일 점심은 엄마표 라면을 먹었다. 물을 많이 잡고 권장 조리시간을 훌쩍 넘겨 두배로 불어있는 면을 네 식구는 호호 불며 머리를 맞대고 먹었다. 엄마는 스프를 반만 넣고 나머지는 김치와 김치국물로 간을 했는데, 그것은 엄마표 라면이 특별한 이유였다. 약간 슴슴하고 말간 국물에 허옇게 퍼진 면가닥을 길게 들어 올려 각자의 대접에 덜어주는 엄마의 눈대중이 정확했다. 넷이 세 개를 끓이고 남은 밥으로 남은 허기짐을 채웠다.
말단 공무원 외벌이에 빠듯한 살림은 엄마를 일터로 내몰았다. 엄마의 일터는 우리가 자주 먹는 라면을 제조하는 제조 공장. 엄마의 일은 터득해야 하는 기술이 없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이었다. 거기로부터 오는 지루함과 적은 월급을 감당할 수 있는 이에게는 편한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엄마는 갱년기의 기복을 그 자리에서 묵묵하게 해결했다.
엄마는 유통기한이 지나 반품된 라면 박스를 관리했다. 주요 업무 중 하나는 봉지 포장 겉면의 유통기한을 지우는 일이었다. 기름이든 아세톤이든 휘발성 액체로 오래된 날짜를 문질러 지워내면 옆의 다른 직원은 지운 자리에 새 날짜를 찍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은 그렇게 다시 유통할 수 있는 제품으로 둔갑했고, 정상 제품에 섞여 다시 매장으로 발송되었다.
일요일이면 슈퍼에 라면 심부름을 갔다. 어느 회사 것이든 엄마표 레시피를 거친 라면은 거의 비슷한 맛을 냈다. 포장을 뜯고 면을 꺼내는 엄마가 마른 면을 코에 대어 본다. 기름 쩐내가 올라오는 누리끼리한 면의 포장을 다른 손으로 집어 들고 자세히 살핀다. 엄마는 포장지 어디에 묻어있을 자신의 지문을 찾는 것 같았다. 그 사이 물이 끓고 생각을 멈추기로 한 듯한 엄마의 손이 포장지를 쓰레기 통에 버리고 면을 끓는 물속에 던져 넣었다. 모르면 먹을 수 있지만 알고는 먹기 어렵다. 그날 엄마는 그냥 흰밥에 김치를 곁들여 드셨다.
만년 동안(童顔)인 여자 연예인이 오랜만에 토크쇼에 나와 근황을 알렸다. 그녀의 나이를 아는 사람들이 그녀의 초(超) 동안 외모에 대해 정신없이 칭찬을 쏟았다. 생긴 대로 사는 것뿐인데 누구는 칭찬을 듣고 누구는 비난을 듣는다. 의술과 미용의 힘을 증명하는 그녀의 외모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높은 경지를 올라와 있었다. 외모에 대한 칭찬이 그녀의 업적을 대신하게 되자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칭찬에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외모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시선과 평가는 빠져나올 수 없는 미용 의료의 굴레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양새다. 젊은 외양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노화의 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도 찾아온다. 젊어 보이는 것만이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여배우의 삶이 고되다. 이미 비대칭으로 변해버린 양쪽 볼의 해결책으로 다시 의술의 힘을 기대야 하는 그녀의 고뇌가 말하지 않아도 깊다.
새 날짜로 갈아입은 유통기한이 동네 피부과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몇 번은 유통기한 일자를 바꿀 수 있어도 결국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은 온다. 유탕면의 기름 냄새가 몇 차례 유통 주기 속에서 누레진 얼굴과 함께 불명예스럽게 숨어있다. 우리는 라면이 아니라 폐기처분도 안된다. 젊음만 반짝 살고 말 가벼운 삶이 아니다.
"저는 늙고 있어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여배우의 목소리가 떨어진 밑천을 인정할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눈속임으로 포장한 라면 봉지 속에 웅크리고 있는 면의 초라한 내면이 평정(平靜)의 반대편에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과 어우러진 내면에 있을 것인데 이를 알리 없는 비슷비슷한 인형들이 강남 한복판에서 서로의 비밀을 감춘 채 옷깃을 스친다.
그날 엄마의 코끝에 닿았을 네모 턱 유탕면이 냄새까지는 숨기지 못해 쩔쩔맸을 상황을 생각하면 좀 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