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냄새
소파에 앉아 종일 쇼츠를 넘기고 있는 남편 옆에서 빨래를 개고 있었다. 뭘 그리 재미있게 보고 있나 궁금하여 슬쩍 엿본 화면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한 외국인이 있다. 그의 입 안에는 씹다만 햄조각들이 튀어나올 듯 아슬아슬하게 혀끝에 걸쳐있다. 미국인으로 보이는 그가 햄맛에 그렇게 인상을 찌푸릴 일인가 의아했다.
스팸 미국 거 아니야?
초록창에 '스팸 먹는 외국인'을 검색해 보니 '그거 고양이 먹는 거 아니야?'라는 의견부터 맛별로 즐기는 외국인까지 호불호가 다양했다. 외국인이라고 다 스팸 좋아하는 건 아니구나.
직장 생활하면서 점심 메뉴로 종종 부대찌개 집에 들렀다.
"다른 건 말고 스팸을 좀 더 넣어주세요." 우리 팀의 일관된 주문을 이미 반복 경험으로 알고 계신 사장님이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아 오케이를 보낸다. 연분홍빛의 스팸이 두부와 같은 모양으로 다소곳이 탕에 들어있는 모습이란 군침이 저절로 돌게 하는 묘약이 들어있는 게 분명했다. 빽빽하게 들어있는 각종 햄과 김치와 떡과 라면 사리가 담긴 붉은 탕은 쉴 새 없는 젓가락 세례로 금세 헐렁해졌다. 그 시절 그렇게 한 그릇 먹고 나면 높은 칼로리 덕분인지 배고픈 줄 모르고 저녁까지 뱃속이 든든했다.
부대찌개를 먹을 때마다 제일 연장자 보스의 레퍼토리가 없으면 허전했다.
"이거 미군들도 안 먹고 버리는 거 우리가 갖다 먹다가 부대찌개가 된 거 아니야~"
'또 그 소리.' 하면서도 먹느라 바쁜 입은 꾸역꾸역 그 말을 처음인 듯 또 들어주고 있었다.
뚜껑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워 몸 쪽으로 잡아당겨 들어 올리면 분홍색 죽은 동물의 주검이 꾸역꾸역 그 네모난 통 안에 가득 눌려 있다. 염분과 잡다한 첨가제로 범벅이 된 고기는 전쟁 시 비상식량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먹을 것이 없기도 했지만 고칼로리 음식으로 전쟁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이만한 식량이 없었던 시대의 식문화도 있었다.
먹고살만한 시대가 되었음에도 스팸은 여전히 한국 음식 속에 잔류한다. 명절에 들어오는 스팸 선물세트가 그것을 말해준다. 왜 우리는 이런 걸 먹고 이런 걸 선물할까. 전쟁통에 먹던 음식이라는 이미지를 쇄신하기라도 하듯 티브이 광고 카피의 세뇌는 온 국민의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았다.
"따끈한 밥 한 술에 스팸 한 조각!"
연예인의 스팸 먹는 모습과 이에 따라오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스팸을 만년 도시락 반찬으로 만들었다. 소금기와 특유의 감칠맛에 우린 쉽게 인이 배겼다. 광고 속 배우처럼 먹는 것이 정설이 되고부터 스팸반찬에 갓 지은 쌀밥을 먹어보지 않은 한국인이 없다. 대학생 자취방 찬장에 식구처럼 들어앉아있는 스팸이 '오늘 뭐 먹지?' 하는 반찬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의 평화가 세계의 평화가 된 듯하다. 세계 곳곳에서 이익다툼과 아귀다툼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지만, 만일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그 규모는 전 세계 전쟁이 되어버릴 형국이 불 보듯 뻔하다. 인류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에 더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와 이념과 같은 막연한 개념의 대립을 들고일어나면 인류는 그 혈기를 발산할 방법을 전쟁에서 찾곤 했다. 현재까지 한반도를 가르고 있는 이념 싸움에서 여전히 스팸 냄새가 진하게 난다.
스팸메일함을 정리하는 일은 하루 일과 중에 거의 초입에 자리한다. 혹시나 잘못 들어가 있을 일반 메일을 거르고 무명의 사기꾼과 약장사의 이메일을 싸잡아 휴지통에 넣으면 마음이 개운하다. 미군 트럭에서 뿌려지는 초콜릿과 캔디와 스팸이 이제는 스팸 깡통 속에 불법 약품을 담아 매일매일 이메일로 뿌려지고 있다.
그때는 트럭을 쫓아가며 달라고나 했지, 지금은 싫대도 자꾸 보낸다. 특정 발신인을 신고도 해보고 스팸으로 분류를 해놓아도 금세 다른 계정으로 달려드니 포기하는 법을 모르는 듯하다. 이메일을 사용하기 시작한 20여 년 전부터 지금껏 이 싸움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전쟁이다. 전쟁통의 스팸이 스팸 전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