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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Nov 17. 2024

국민 친구 153

필기구계 역사의 산증인

모르는 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유명하고, 호불호가 희미해 대다수의 '좋아요'를 받는 물건들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나중엔 보편화되어 누구나가 애용하는 물건에 우리는 깐깐하게 '국민' 타이틀을 허락한다. 국민템이 된 물건은 한국의 대표성마저 띄고 있어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상식이 되고, 따라서 잘알못들에게는 의도치 않게 소외감을 안기기도 한다. 육아 박람회에 가본 이들의 말에 의하면 전시장은 그야말로 국민 육아템의 쇼라고 한다. '국민' 타이틀이 붙으면 무조건 사재기하는 초보 부모들에게는 적당한 분별력도 필요하다. 요즘 시대의 국민템은 수상쩍은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외모와 그럴듯한 쓸모의 기저에 상업적인 냄새가 비릿하게 배어 나온다.


모나미 153은 우리에게 추억의 볼펜이자, '찐' 국민 볼펜이었다.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었으며 한 자루가 아닌 뭉텅이로 자주 꽂혀있곤 했다. 필기구라는 본래 의도와 기능에 걸맞게 153의 외모는 다소 심심하고, 교과서처럼 재미가 없었다. 볼펜이면 볼펜의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되었던 시대였고, N잡보다 한 우물이 더 존중받는 시대였다.  


시험시간, 옆자리 아이가 자꾸 다리를 떨었다. 손바닥을 펴 경주마의 눈가리개처럼 시야로 들어오는 그 아이의 다리를 차단했다. 다시, 앞자리 친구의 똑딱 소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엇박의 미묘한 박자와 똑딱 소리가 불러오는 시원한 경쾌함이 한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는 블랙홀 행이다. 시험 중의 초조함은 손가락 위에서 153의 몸통을 울리며 교실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영어 듣기 평가라도 할라치면 똑딱 소리는 더욱 예민한 감시 대상이 되었다. 숨소리도 크게 낼 수 없는 분위기에 천둥 같은 손가락 튕김은 따가운 눈총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모나미 153의 과거(좌)와 현재(우)


공부방 선생님은 빨간색과 파란색을 투명테이프로 꽁꽁 묶었다. 비틀릴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세 군데는 묶어야 안정감 있는 채점이 가능했다. 보색 대비가 뚜렷한 두 색의 153은 60도 각도로 기울어진 채 시험지 위를 자유자재로 미끄러졌다. 빨강은 동그라미를, 파랑은 오답표기를 담당했고, 우등생의 시험지 위에 그려지는 빨간 용수철은 영광스러운 훈장이 되었다. 용수철 고리가 몇 번 문제에 걸려있는지 알아볼 수도 없게 선생님의 채점은 빙상 스케이트 선수를 닮아 있었다. 스케이트 날이 얼음 위에서 작은 턴을 할 때마다 갈려나가는 얼음 조각은 동그라미 선 안에 작은 점으로 조각을 종종 흘렸다. 


잉크는 자주 흘렀다.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꽂아둔 볼펜은 종종 여름철의 더운 공기와 습도를 만나 연필꽂이 바닥을 흥건하게 물들이곤 했다. 함께 있던 매직과 사인펜 끝에 색색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153 잉크는 여간 끈적한 게 아니어서 닦아내는 휴지를 통과해 손에도 덕지덕지, 금세 구둣방 아저씨 손을 만들어 버렸다.


독도 기념품과 회사 판촉물로 익숙한 얼굴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몸통에 잉크색상의 머리와 꼬리를 조합한 순둥순둥한 외모는 그 사이 다양한 옷과 재질을 입었다. 예전의 국민 타이틀보다는 멋쟁이 타이틀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모나미 153은 출시 가격인 15원보다 천배 이상의 개런티를 받고 다시 시장에 나타났다. 외국물을 먹고 온 유학생처럼 촌티를 떨쳐낸 모습에 눈을 의심하며 이리저리 돌려보고 만져보았다. 아직 건재한 국민템이 오랜 친구라도 되는 양 기껍고 반가웠다. 


진초록 금속 바디에 묵직한 성정을 가지고 돌아온 최고급 레벨의 153은 예전보다 괄약근 조절에 부쩍 힘을 쓴 모습이다. 종이 뒷면까지 투과하는 똥과 똥 번짐 현상이 더 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본체에 딸려온 볼펜심은 예전의 빨대 같은 형태를 버리고 트렌드에 맞게 말쑥한 모습이 되었다. 매끄러운 필기감으로 종이 위를 활보하는 153이지만 다시 국민 타이틀을 되찾아 올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잃어버려도 개의치 않던 내 마음이 예전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는 곳마다 널브러져 있어야 할 만한 것이 만년필처럼 케이스에 담겨 서랍에 고이 모셔지고 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거리감을 어찌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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