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소리 Dec 03. 2024

식탁과 우산

집안의 물건 중에 제일 바쁜 건 단연 식탁이다.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고도 티타임에 서재역할까지 하려니 네모진 식탁에 발이 여덟 개여도 부족하다. 딸린 의자의 프레임 위에 덧댄 합성피혁이 군데군데 틈이 나기 시작했다. 앉으면 피식하며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나는 의자에 앉아 지금도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 아침 아이가 비우고 간 밥그릇과 물병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제 먹다 남은 마른 빵 한 조각도 있다.


원목 식탁은 그 맨질한 나무 촉감이 좋아 애초부터 식탁보를 깔지 않았다. 8년 동안 수천번 내려놓고 치웠을 그릇이 잔흠집을 주름처럼 남겼고, 종종 주방에서 숙제를 하는 아이의 유성펜 자국이 드문드문 점처럼 남았다. 4인용 식탁에 세 명의 가족 구성원은 늘 같은 자리에 앉는다. 아이의 자리의 식탁 밑에는 굳은 밥알이 아이의 흔적이 되어 붙어있다. 내 옆자리는 늘 비어 있는데 그곳에 1인용 찻잔과 찻잎을 놓아두었다. 이 자리에 앉아 마시는 거무스름한 보이차 한 잔은 마음속 뒤엉켜 복잡한 무언가를 깔끔하게 씻어냈다. 새벽 5시의 기상과 함께 이 자리에 앉는 나는 매일의 하루를 똑같이 시작한다. 매일 똑같이 시작하는 하루지만 같은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 어제는 이 자리에 앉아 영화 <패터슨>을 보았다. 버스 운전사인 패터슨은 틈이 날 때마다 쓰는 사람이었다.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평면적 관찰을 사랑하고 그의 객관주의 시를 표방한다. "관념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로 (No idea but in things)" 표현하는 시인의 사상이 주인공의 삶과 영화 전체와 깊게 닮아있다.


패터슨은 서랍에 돌아다니는 성냥갑을 보며 시를 짓고, 어린아이의 시를 보며 그 순수한 아름다움에 경탄한다. 일상은 그에게 시가 되고, 일상은 내게도 글이 된다. 그에게 성갑이고 폭포수였던 것이 오늘 내게는 식탁이 되었고 우산이 되었다.


닳고 흠집난 식탁 위에 연초록 마카롱 색의 pvc매트를 깔았다. 가로와 세로가 오차 없이 정확히 맞춰진 매트는 마치 식탁과 원래부터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매트의 완충작용으로 냉장고의 반찬 그릇이 쏟아질 때 그 퉁명하고 둔탁한 소리는 반으로 얕아졌다. 아이가 젓가락과 숟가락을 집고 놓는 소리도 전보다 얌전해졌다. 한 변이 벽에 붙은 식탁이 자꾸 밖으로 밀려 벽으로부터 멀어진다. 난 그럴 때마다 무선 청소기를 충전기에 도킹하는 것처럼 이따금씩 테이블 다리를 들어 벽에 힘껏 밀어준다. 쿵하고 부딪히는 소리에 자리를 온전히 찾아간 식탁이 아까보다 부쩍 네모반듯해 보인다.


식사를 할 때도, 차를 마실 때도, 책을 볼 때도, 글을 쓸 때도, 손님이 올 때도, 나는 이 자리에 앉는다. 주방 앞에 있는 다이닝 공간은 우리 집에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때문에 식탁은 거실의 한가한 소파가 눈엣가시다. 티브이 없는 집을 표방한 집 안 공간은 짝꿍인 티브이의 부재에 소파의 입지가 불안하다. 빨래를 개거나 낮잠을 자는 용도로 쓰이는 소파는 거실에 있음에도 애초의 용도와는 다르게 인구 밀도는 제일 낮은 곳이다. 소파를 드러내고 식탁과 비슷한 테이블을 놓을까. 식탁의 과도한 업무를 조금만이라도 분담할 수 있다면 의자의 합피도 틈을 벌이는 속도를 조금은 늦출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 가장 한가한 이는 단연 우산이다. 특히 요즘처럼 건기에 들어서면 우산은 꽁꽁 묶인 벨크로에서 풀려날 기회조차 없다. 허구한 날 맑은 날과 구름 낀 날로 이어지는 바람에 여름 장마철에 잠시 물마를 철없던 이들은 선인장이나 낙타등이 부럽다.

바싹 마른 입술의 우산은 심심하다. 신발장 서랍에는 한 번도 비를 맞아 본 적 없는 우산이 몇 자루나 있다. 휜 등살과 주름을 펼 수 있는 날을 학수고대하면서. 먼지가 뒹굴어 다니는 신발장이나 우산 통에 꽂힌 우산 하나를 허공향해 힘차게 펼쳐본다. 급작스런 스트레칭에 놀란 주름진 얼굴은 몸이 영 마음 같지 않다고 느낀다. 살 끝에 걸린 옷이 자꾸 벗겨지고 관절이 뜬금없이 밖으로 꺾인다. 지난 장마철에 태풍과 만나 뒤집혀본 기억은 그 후 이렇게 자주 문제를 일으다.


오랜 시간 외출하지 못한 이들의 얼굴은 접힌 주름에 따라 색이 바래있다. 겹겹이 접힌 천 안쪽의 선명함과 바깥쪽의 빛바램이 만들어낸 시간의 무늬가 보기 싫다. 주름을 따라 접힌 천의 닳아진 틈새로 빛이 바늘같이 들어온다. 우산은 날씨를 한없이 기다려주지는 못하겠구나.


우산이 방도를 냈다. 밖에 나갈 방도를.

양우산이라는 이름으로 이제는 해도 가려준다. 이전보다 쓰임새가 늘어난 덕분에 외출은 늘었지만, 분실의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길가의 공용자전거 바구니 안에 주인을 잃은 우산들이 자신의 삶을 설명한다. 비 오는 날만 기다리던 신세는 주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기다리는 것은 우산의 숙명이다.    


쉼만 기다리는 식탁과 쓰임만 기다리는 우산이 한 공간에 살고 있다. 식탁은 우산이 부럽고, 우산은 식탁이 부럽다. 이 집에 사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휴가만 기다리는 남편과 그 남편의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그렇다. 기다리는 대상만 다를 뿐,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런데 삶은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 삶이자 운명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