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만은 하지 말아줬으면 했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뒷감당은 아빠 몫이다. 남편은 목소리를 키워 한 마디 보탠다.
"아빠 닮으면 좋지 인마! 표정이 왜 이래~!"
아이를 갓 낳았을 때, 아이의 혈액형이 아내와 같은 걸 본 남편은 은근히 실망한 낯빛이었다.
'성별도 다른데 혈액형도 다르다고?'
내가 보기에 이 둘은 성별과 혈액형을 제외한 모든 것이 똑 닮았다. 본인들만 모른다.
연변 특산 '사과배'
내 이름은 '사과배'
엄마는 연변 돌배나무, 아부지는 함북 배나무다. 나는 한국의 배보다는 좀 작고, 얼추 사과와 크기가 비슷하다. 엄마는 내가 엄마를 닮아서 살이 단단하고, 아부지를 닮아서 맛이 달콤새콤하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얼굴이 꼭 사과처럼 발갛게 생겼다는 것이다. 엄마 아부지는 둘 다 얼굴이 누르뎅뎅한 것이 영락없는 배인데 말이다. 동네 어른들은 나를 보고 내 진짜 아부지가 따로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어른들이 하는 말이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후로 나를 사과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이름은 '사과배'가 되었다.
소문은 돌아 돌아 아부지 귀에 들어갔고, 아부지는 막걸리 한 사발에 취해서 누런 얼굴로 집에 들어와 애먼 엄마와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내가 말이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친자 확인을 해야겠단 말이지! 그러면 저놈들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거 아니냔 말이지비!"
아부지는 그간 속에 담아 두었던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며 이참에 확실히 해두어야겠다는 심사다. 내 성미가 아부지를 닮아서 남한테 할 말도 잘 못하고 속을 자주 끓이곤 하는데, 그 짐작은 당연히도 검사 결과에서 확인되었다. 나는 영락없는 엄마 아부지의 열매였다. 의사 슨생님은 내 얼굴이 바알간 것이 연변 지역의 가을겨울 날씨가 추워서 얼었다 녹았다 해서 그런 거라고 하셨다. 아부지는 그제야 나에게 물려준 달콤새콤한 맛을 자랑스러워하셨다. 나에게서 자신의 유전적 지분을 확인하고 세상 다 가진 듯 기뻐하셨다.
들장미의 중간 유전
본전은 했다.
들장미가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었다. 색색깔의 꽃들이 화단을 장식했고, 꽃을 보면 으레 그렇듯 한 송이 한 송이에 눈을 맞춰 인사했다.
그 안에서 문득 너란 아이를 본다.
흰 장미와 붉은 장미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서 나의 시선을 기다리던 너란 아이.
한눈에 알아봤다.
'넌 참 엄마 아빠를 골고루 닮았구나.'
옆에 있던 유전자 본체들도 자신들을 반반 닮은 아기 꽃의 모습에 흐뭇하다. 어쨌거나 자신들은 형질을 후세에 남기는 원초적 미션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섞는다.
고등어를 조리기 위해 양념을 만든다. (이때만큼은 내가 조물주다.)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설탕, 다진 마늘, 후추, 생강가루, 참기름, 통깨
한국 요리의 양념재료들은 어쩜 그리 개성이 강한지 대충 섞어 놓았다간 서로 잘났다고 입에서 겉돌기 십상이다. 그럴 땐 꼼꼼하게 잘 섞어서 실온에 한 시간을 두고 기다린다. 눈꼬리를 치켜뜬 양념은 어느새 순한 강아지가 되어 주인 손을 기다린다. 잘 어우러진 양념은 어디에 넣어도 맛있는 만능 양념장이 된다.
각각의 양념 재료는 본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얼굴을 가린 채 강강수월래를 돌고 있다.
글, 사진 엄민정
상하이 거주 13년.
한국의 김치와 상하이의 샤오롱바오처럼 익숙한 것들을 다시금 들여다보며 의미를 찾는 일에 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