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조연

by 싱지원


초대 가수의 공연. "큰 박수로 청해 듣겠습니다"라는 소개 멘트를 하고 나면 무대 옆, 혹은 무대 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반대편 관객의 얼굴을 살펴본다.


황홀함, 행복함, 후련함으로 가득해서 걱정이나 근심 따위에게는 내어줄 자리가 없는 그런 얼굴들.


이 행사의 기획자도 아니고, 노래와 춤으로 감동을 주는 가수도 아니면서 마치 내가 그들에게 황홀한 시간을 선물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나운서라는 일을 하면서 내 이름으로 일을 한다는 점, 가장 젊고 예쁜 모습을 남길 수 있다는 점, 사는 이야기를 듣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는 점 등 좋은 점을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로 많지만 그중 제일은 역시 이런 순간들이다.


흔히 아나운서 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은 없었다. ​다음 무대를 꾸며줄 사람을 소개하고, 상 받는 사람이 박수를 받을 수 있게 유도하고, 인터뷰이의 진짜 생각이 나올 수 있게 질문을 던지. 그러니까 주인공을 더 빛나게 만드는 조연일 뿐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닫고 난 이후로 이 일이 더 재밌어졌다.

인생 첫 방송 출연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물컵을 든 손을 덜덜 떨거나 심지어는 전날 밤부터 잠 한 숨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하는 출연자들이 의외로 많다. 방송 출연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방이라 더 많은 걸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긴장을 하면 준비한 만큼 보여주지 못할 테니 그건 출연자와 제작진 어느 쪽에도 도움 되지 않는다.


특히 출연자는 생애 첫 방송을 말아먹은 트라우마로 인해 앞으로 어떤 방송에도 나가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도 있고, 남몰래 이불을 차게 될 기억이 하나 추가될 수도 있을 테다. 그런 불상사를 막으려고 나름의 규칙을 정했다.


녹화 전에 대기실을 먼저 찾는다. 출연자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나면 얼음이 녹듯 얼굴에 짙게 드리운 긴장 가득한 그림자가 조금씩 사라진다.


때로는 묻지도 않은 주말부부 생활의 좋은 점, 서울에서 나고 자랐는데 창원에서 일하게 된 배경도 풀어놓는다. 진한 화장과 화려한 의상으로 온 힘을 다해 뭔가 '다른 척'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잘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다.


누구나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카메라 여러 대와 수십 개의 조명에 압도된다. 어렵게 풀어놓은 긴장이 출연자를 다시 압도하곤 하는데, 어떤 카메라가 당신을 비출 것인지, 오늘 녹화는 얼마나 진행될지 안내한다. 그다음 멘트가 소위 킥인데 '녹화 시작하고 10분까지가 제일 긴장되고 그 이후부터는 거짓말처럼 편안해지실 겁니다'라는 거짓말을 보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거짓말이다.


'On air'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당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우리는 오늘 한 팀이라는 마음으로 출연자를 바라본다. 제작진의 의도와 출연자의 상태를 동시에 살피면서 질문으로 빈 곳을 채우다 보면 어느새 녹화가 끝이 난다.


출연자들이 '생각보다는 괜찮았다'는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가길 바라며 이제 나는 또 다음 팀을 꾸릴 준비에 들어간다.


아나운서를 꿈꾸게 된 건 아주 오래전 TV 화면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앵커를 본 이후부터였지만 10년 가까이해보니 스스로가 빛나기보다 누군가를 빛내는 일에 더 가깝다.


주인공이 아니면 어떤가. 기꺼이 조연을 자처하는 이 일은 이제 내 삶의 자부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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