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아나운서 공채가 떴을 때 이미 나는 KBS 을지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라디오 뉴스는 만 오천 원, TV 뉴스는 10만 원, 이렇게 방송 한 건당 진행비를 받기 때문에 바우처 아나운서ㅡ물론 스스로가 그렇게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늦게서야 알게 됐지만ㅡ라고 불렸다. 업계 특성상 규모가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 프리랜서에서 정규직으로 이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는 했으나 내가 공채 합격을 간절히 바란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햇살이 와르르 쏟아지는 봄날이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온 언니의 말은 단호하고 덤덤했다. “지원아, 놀라지 말고 들어, 아빠 사업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 우리 급하게 이사 가야 할 것 같아." 가슴 위로 커다란 바위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쏟아지던 햇살과 기분 좋게 살랑이는 바람이 그렇게도 잔혹하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을까.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아빠가 얼마 전 시작한 사업에서 동업자가 사업 자금을 들고 도망갔고, 그동안 세금 납부가 밀려 아빠 앞으로 10억이 넘는 빚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위기,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5여 년 전쯤엔 아빠가 아는 동생의 빚보증을 서줬다가 홀랑 뒤집어썼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심 없이 사람을 곧이곧대로 믿은 대가다. 그러나 이번엔 과거 위기 때와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제2금융권 대출뿐만 아니라 지인들에게 적게는 몇 십만 원에서 많게는 몇 천만 원씩 지인들 돈도 빌린 모양이었다.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유난히 해가 잘 드는 집이었다. 앞에는 작은 동산이 있고 뒤에는 도로가 나있었다. 남쪽을 향해있어 거실로 빛이 쏟아지곤 했고, 사시사철 옷을 갈아입는 산을 집 베란다에서 매번 볼 수 있었고, 바람도 어찌나 잘 통하는지 한여름에 에어컨 없이도 살 수 있는 집이었다. 엄마는 우리가 그 집에 처음 입주하던 날, 너른 거실에서 아빠와 언니, 내가 나비춤을 추며 빙글빙글 돌았던 순간을 자주 이야기했는데, 그만큼 엄마에게 집은 단순히 주거 이상의 의미였다. 17평에서 25평, 44평, 넓어지는 평수는 곧 성실하게 살아온 삶의 궤적이자 결과였다.
그런 집을, 잃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달리 엄마는 말없이 책장에 꽂힌 책들과 앨범을 박스에 하나씩 신중하게 집어넣었다. 그 가운데는 못 보던 낡은 초록색 앨범이 있었다. 앨범 첫 장에는 1998년 4월, 내가 만 네 살 10개월 때 영재 판정을 받았던, 노랗게 바랜 지능검사 결과지가 자랑스레 꽂혀 있었다. 엄마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결과지 몇 장을 찍고 다시 말없이 짐을 옮겨 담았다. 아빠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도와 짐을 옮기는 데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큰 짐들이 빠져나가자 그제야 넓은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족과 함께한 세월만큼 스위치에는 푸른 손때가 탔고, TV장과 소파가 있던 자리도 짙은 흔적이 남았다. 얼마 간의 적막이 감돌았다. 서로 약속한 듯 각자의 기억을 되짚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이번에도 나비춤을 추던 순간을 기억해 냈을 것이고, 아빠는 글쎄, 거실에서 텐트를 치고 밤새 깔깔대던 날을 회상하고 있을 것 같았다. 엄마의 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자주색 벽돌의 4층짜리 빌라 2층에 새롭게 둥지를 텄다. 보증금 3000만 원에 85만 원짜리 월셋집이었다. 화장실에 샤워기가 없고, 천장에 물이 새는 등 불편하고 낯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특히 빛이 없어 종일 어둡게 지내야 하는 우울한 분위기가 가장 참기 힘들었다. 작은방 쪽 창문을 통해 보이던 키가 큰 아파트. 얼마나 큰지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빛은 권력이라는 것을,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저리도록 알게 됐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므로 그 좁고 낡은 집에서도 먹고 자는 일은 반복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타지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자연히 새 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멀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정체 모를 불편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우처 아나운서라고 하더라도) 아나운서가 된다는 건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신분 상승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어딜 가나 환대받고,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더욱 어둡고 축축하게 느껴졌다.
정규직이 되면 그 간극을 좁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대출이 잘 나오고, 더 이상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고, 안정적인 소득까지 보장되니 지원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랑하는 이 일을 그저 걱정 없이 오래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자주 말해왔지만, 그리고 그것 역시 진실에 가깝지만, 내게는 보다 천박한 이유가 여럿 있었던 셈이다.
간절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적당히 잘 포장했던 덕분일까 아니면 그것이 진짜 간절함으로 드러나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걸까. 기적적으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공채에 합격했다.
그렇다고 기울었던 가세가 갑자기 제자리를 찾는다든지, 재벌가에 시집을 가서 팔자를 편다든지 하는 동화 같은 결말은 (애초에 꿈도 꾸지 않았지만) 없었다. 한 계단 올라섰다는 알량한 자부심이 나를 지탱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공영 방송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다는 거창하고 우아한 문장 뒤에 숨겨진 진짜 동기를 떠올릴 때면 죄책감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입사 이후 내 몸을 뉘일 작은 집을 마련했다. 매일 같이 수십, 수백 개의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일을 하면서도 이따금씩 그 어둡고 축축한 방을 떠올렸다. 창문 너머로 보이던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그때 느꼈던 빛의 부재. 조명의 뜨거운 열기를 견뎌내는 일이 어쩌면 어둠 속에서 빛을 갈구하던 삶보다 더 고상한 것 아니냐는 위로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