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이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게 벌써 3년 전이다.
마시면 당뇨도 낫고 혈압도 낮춰주는 신기한 물을 파는 박 모 아저씨 ㅡ 우리는 그를 사기꾼이라고 했지만 섭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늘 그를 감쌌다 ㅡ는 섭에게 사업 아이템을 추천하며 바람을 넣었고 그 때문에 반 평생을 비누 회사에서 몸담은 그가 돌연 농산물 창고 대여 사업을 한다고 하지를 않나, 만병통치약인지 물인지를 집에 몇 통씩 가져와 밥 먹을 때마다 마시지를 않나, 아무튼 상식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몇 년 간 지속되다가 결국 섭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주유소 일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일자리 구하기가 워낙 어려워 고심 끝에 얻어낸 자리가 바로 주유소였다. 아르바이트 구인 사이트에 하루에도 몇십 개씩 새 공고가 올라오는데 일자리가 없다니, 당시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아마도 환갑이 넘은 노인을 써주는 곳이 없었던 모양이다.
주유소는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 그다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애매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걸어서 출퇴근을 할 수 있지만 우연히라도 동네 사람을 마주치지는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섭이 일을 시작한 지 열흘쯤 지났을까, 일은 좀 할만하냐고 물으니 대뜸 직업에는 다 귀천이 있는 것 같다는 엉뚱한 답을 보내왔다. 섭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주 오래전 악보도 못 읽는 내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전업주부가 돼서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줬다. 돈은 삶을 살면서 최우선의 가치가 아니라 일을 즐겁게 하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므로 대단한 일 아니어도 되니 그냥 네가 즐거운 일을 하라고 강조하던 그의 입에서 '직업에도 귀천이 있다'는 말이 나오다니. 육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를 지탱해 온 세계관이 단 열흘 만에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직원을 부리던 사람이 젊은 사람들에게 예예- 하며 고개 숙이는 게 영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섭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예전엔 머리가 핑핑 돌았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머리가 다 굳은 건지, 택시 회사별로 장부를 나눠 적어야 하는데 도무지 회사 이름과 차 번호가 매칭이 안된다'라고 했다. 출근 시간 전에 회사 택시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오는 때에 허둥대다가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눈치를 한 몸에 받는다고.
더 큰 문제는 함께 일하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동료가 패배감에 젖어있었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이런 일은 인생 밑바닥인 사람만 하는 거고, 최저 시급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하는 것만큼 개고생이 어딨겠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섭은 퇴직하고 재미 삼아 일하는 거라며 스스로를 방어했고, 가끔씩 묻지도 않은 딸의 직업을 말한다던가, 딸이 진행하는 뉴스를 유튜브에서 찾아 일부러 크게 틀어놓기도 했다. 왜 그렇게 뉴스를 크게 틀어놓느냐고 누군가 물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딸이 아나운서라고 자랑스레 얘기했다. 그러면 사람들의 대우가 묘하게 달라진다고 했다. 재미 삼아하는 일이라는 말을 그제야 믿어주기라도 하는 듯이.
오랜만에 만나면 섭은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5만 원어치 넣어주세요'도 아니고 손이 간신히 나올 정도로 창문을 살짝 내리고 '5만 원' 하며 카드를 무성의하게 건네는 손님, 동료가 말도 없이 늦어서 아침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 한여름이라 유니폼이 다 젖어서 찝찝해 하루에 최소 두 번은 샤워한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래도 동태눈을 하고 돌침대에 누워서 작은 TV 화면만 보던 때보단 몇 배로 건강해 보여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주유소 일도 꽤 익숙해진 건지 '이제 밑바닥을 봤으니 더 내려갈 곳도 없다'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또 한 번은, 날이 너무 덥거나 추운 날 사람들 차에 기름을 넣어주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도 생겨났다고 했다.
내게도 어떤 변화가 감지됐는데, 언젠가부터 주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눈가에 주름살, 머리에서 귀까지 흐르는 땀방울, 거친 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가능한 친절하고 공손하게, 눈웃음을 곁들여 '5만 원어치 넣어주세요~^^'라며 부탁하게 됐다. 섭에게도 잘 보여준 적 없는 미소와 친절이었다. 표정을 짓는 사람도 어색하고 불편했으니 보는 사람 입장에선 좀 섬뜩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주유소만 떠올리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을, 누군가의 가족일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각자의 몫을 해내면서 동시에 서로의 삶을 떠받치는 사람들의 얼굴에, 이전보다 한결 선명하고 애틋해진 시선이 머문다. 혹시 누군가 내게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묻는다면,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 귀하고 천함이 어디 있느냐고 답하고 싶다. 아빠가 가르쳐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