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타인의 기억이 된다. 마주하고 교류하고 이야기하며 누군가의 기억 속에 고요히, 때로는 요란하게 흔적을 남기며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 자체로도 살아있는 인간이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태어나고 살아간다. 물리적 죽음마저도 이 생명을 앗아가지는 못한다. 타인의 서사화를 통해 끊임없이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는 것이 기억의 기적이자 명예이다.
삶이 발전을 멈추는 순간은 이 기억되기를 포기하거나 멈추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나 역시 기억되려는, 좋게, 정당하게 기억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왔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만약, 오히려 기억됨으로써 괴로워진다면? 물리적 죽음이 기억의 죽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애석해진다면? 그저 괴로움과 원망만이 남는다면? 기억됨은 정말 명예로운 것일까?
연극 <팜 파탈; 가려져 버린>을 관람하며 내내 그러한 생각에 시달렸다. 타인에 의해 기억된 서사가 아닌, 자신의 서사를 직접 발화하는 신화 속 인물들은 나에게 서사화의 본질과 기억됨의 이면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제공했다.
<산울림 고전극장>은 '고전문학, 이야기의 기원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이는 문학이라는 형식이 갖춰지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신화, 민담, 우화 등의 이야기들을 현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로 이뤄져 있다. 그 중 마지막 작품인 <팜 파탈; 가려져버린>은, 흔히 '팜므 파탈'이라는 정의로 납작해져버린 신화 속 여성들을 되짚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팜 파탈; 가려져버린>은 신화의 시초 격인 수메르 신화, 조금은 낯선 유대 신화,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할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하고 있다. 무엇보다 재밌는 건 극이 토크쇼의 형식을 빌려 진행된다는 점이다. 오래된 서사의 무게감을 덜어내고 보다 친근한 접근성을 취한, 현명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의 배경이 되는 토크쇼, 일명 '히든죄수'는 사람들의 부정적 선입견에 갇힌 인물들이 직접 등장해 해명의 기회를 얻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현대의 관점으로 재판결하며 마무리 된다.
히든죄수의 주인공은 네 여자, 수메르 신화의 인안나, 유대 신화의 릴리트,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와 펜테실레이아이다. 각각의 서사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앞에는 언제나 유사한 수식어가 붙는다. '치명적인', '남성을 유혹하는', 즉 '팜므파탈'이다. 여성이라는 성별은 그들을 언제나 조연으로 만들어 버린다. 남성 인물과의 어떠한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들은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의 머릿속에 아주 납작한 형태로, 편견 가득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네 여자의 앞에는 각기 다른 죄목이 붙는다. 그들은 모두 해당 죄목을 크게 부정하지 않는다. 남편과 시누이를 살해해 죄인이 된 인안나는 부정을 저지른 남편의 죄가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음을 밝힌다. 인간의 원죄를 유발했다는 의미에서 도의적 살인죄가 부여된 릴리트는 아담이 남성으로서의 우월함을 빌미로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메두사는 본인이 끔찍한 괴물이 되어 고립된 이유가 강간'당했기' 때문이라며 억울함을 표한다. 펜테실레이아는 단 한 순간도 전사가 아닌 적이 없었지만, 죽음과 동시에 그저 '여자의 신체'로만 환원되어 모욕적인 일을 겪은 사실을 발화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든 안타까움에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됨의 저주에 갇혀 버린 그들은 새로운 시선을 필요로 한다. 인상적인 것은 네 여자의 관계이다.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들이 어딘가 닮아 있음을 발견한다. 그 과정에서 함께 분노하고 원통해하며, 종국에는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다. 전혀 다른 시간대와 신화 속의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여성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얼마나 유사한, 또 납작한 서사 하에 지워졌었는지가 명백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네 여자의 이야기를 곱씹다 보면 그들의 죄목은 곧 여성 전체에게 내려져온 죄목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해왔고, 그들의 서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남자를 욕심내는', '남자의 옆에 있는', '남자의 사랑을 받거나 혹은 받지 못하는' 등의 몇 가지 단순한 필요성으로만 그들의 서사가 구성되어 왔다. 이것은 기억됨의 저주이다. 기억하고 싶은, 익숙한 방식으로만 기억하려는 우리들의 과오이다.
그 오랜 역사의 기억을, 손 대는 것마저 망설여지는 근원적 신화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분명 용기 있는 시도이다. 게다가 남성, 혹은 타자에 의해 재해석된 것이 아닌, 그들 자신의 직접적인 발화를 들어보는 경험도 분명 신선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묘사하고 두둔할 분명한 언어를 갖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오랜 신화 속 이야기라고만 치부하기에는, 현재까지 그들과 같은 죄의 누명 하에 살아가는 여성들이 너무나 많다. <팜 파탈; 가려진 시간>은 그 여성들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득히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현실적 감각 또한 일깨운다. 뒤늦게나마 멋진 여성 예술가들이 이것에 귀 기울여볼 필요성을 느꼈다는 점에서, 같은 창작자로서 마음이 든든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신화의 재해석은 그들이 모든 서사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오랫동안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발화되지 못한 점, 아니, 그들의 납작함이 문제화 되지도 못했던 것은 이 원형의 서사들이 지닌 한계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그들을 현대식 재판대에 올려 다시 살펴봐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그들을 기억됨의 늪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대신 기억됨의 명예를 안겨주는 것이다.
결국 누명을 벗고 죄인에서 벗어난 그들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명찰을 달아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팜 파탈; 가려진 시간>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앞으로도 극단 산울림의 다양한 행보를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