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m 달리기
스피드와 순발력. 민첩하고 섬세한 볼 트래핑과 슈팅능력, 팀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시야. 구석구석을 찌르는 창의적인 패싱능력. 개인의 능력을 녹아내는 팀 전술. 내가 농구나 축구를 즐겨했던 이유다.
사실 달리기는 좀 시시하다는 편견이 있었다. 목적 없이 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생애 첫 달리기가 수동적으로 회사에 끌려가 뛰어해 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데다, 원래 자리를 탈출한 요추 디스크가 신경을 자꾸 누르는 탓도 있었다. 달리기는 녹색 점멸에 길을 건너기 위해 사용하는 생활용 스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허리를 다치고 격한 운동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야구로 넘어온 순간에도 순수 달리기는 하지 않았다. 달리기가 주는 기쁨과 카타르시스를 알 리 없었다.
16년 만에 10km를 뛰었다.
지루함이 주는 철저함이 좋다
주에 한 번은 꼭 달리고 있다. 쇠질을 하면서 무게도 쳐야 하고, 주말엔 아이와 국내 곳곳에 여행을 다녀야 하니 달리기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달리기의 재미에 빠지고 나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꼭 달리려고 한다. 달리기가 참 좋다.
우사인 볼트도 100미터를 한 걸음에 갈 수는 없다. 어느 누구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뼈와 근육만으로 몸을 옮겨야 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레이스지만, 그 지루한 철저함이 좋다.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서 책임지고 끝내야 하는 그 개인성도 좋다. 더디지만, 거리를 좁혀 나가고, 반환점을 돌고 꾸준하다 보면 어느새 상당한 거리를 장악하게 된다.
10km를 달릴 수 있을까?
평상시와 같이 간단한 복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러닝머신은 별로다. 고무판을 뛰다 보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절로 달려지는 느낌이 들고, 무엇보다 제자리를 뛰다 보면 이마에 건 떡을 보며 달린 채 사육되는 느낌이 든다. 영 재미가 없다.
오늘따라 몸이 가벼운 느낌이다. 전날 맥주로 이어가지 않고 소주로 끝내길 잘했다. 안주보다 술잔에 손을 더 가져간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봄을 재촉하는 수변공원의 비릿함도 오늘은 안정적이다. 달릴 때 종종 만나는 한 쌍의 원앙이 물을 떠다닌다. 오리들 사이에서 단연 군계일학으로 그 자태를 뽐내는 녀석들이다. 고고한 태도의 유유자적이지만 실상 발은 허둥대고 있을 거면서.
갑자기 의문이 든다. 16년 전에 10km를 뛰어 본 적이 있다. 완주의 대가로 1주일을 뒤뚱뒤뚱 절뚝였지만. 엉망이라 할지라도 10km를 달린 경험이 있긴 했다.
운동을 하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세트로 치는 쇠질의 개수가 바람처럼 산뜻하고, 두 팔로 봉에 매달려 몸을 당기는 턱걸이를 하면서도 몸이 유독 가볍게 느껴지는 날. 세트가 거듭될수록 유독 근육 펌핑이 확장되어 이두, 삼두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날. 그리고 오늘처럼 호흡이 유독 안정적인 날이 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못 참는다.
그냥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뛰는 거야
집 쪽이 아닌 좌측으로 방향을 바꾼다. 같은 곳을 두 바퀴 뛰는 것은 정신적으로 피곤하다. 수변공원을 크게 돌아서 뛰기로 했다. 처음으로 달리는 곳의 경치를 두리번거리며 달려야 하는 거리를 의식적으로 잊어 본다. 오? 생각보다 괜찮다. 2년 동안 산과 평지를 달린 것이 분명 도움이 됐다. 그동안의 달린 시간이 하체를 지탱한다.
아직은 다소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달린다. 가슴과 복부로 맞는 맞바람이 참 시원하다. 달리는 중간중간 속도를 체크한다. 사과 회사의 노예가 되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손목시계가 나의 페이스메이커다. 손목 위 작은 액정을 참고하면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다. 7km 정도가 지나고 나니, 좌측 슬관전에 저릿함이 올라온다. 인내가 늘어날 조짐은 아니다. 몸의 밸런스에 조금 더 신경 쓴다. 한 축으로 무게가 쏠리지 않아야 한다. 안정적인 호흡으로 폐에 산소를 공급한다. 8km를 알리는 전자목소리가 사과 이어폰을 통해 전해졌다. 얼마 안 남았다.
달리기나 자전거, 등산 같은 운동을 하다 보면 간혹 무릎 바깥쪽으로 통증이 올라올 때가 있다. 대게가 장경인대염 증상이다. 단순 염좌와는 다르기 때문에 치료와 치유시간이 필요하다. 운동은 나의 몸에 맞게 해야 한다.
16년 만에 10km를 뛰었다. 45분에서 시간은 조금 늘어났지만 뛰고 나서 몸에 남는 중력의 부담이 전혀 없다. 5km의 거리에 한계점을 그었던 건 스스로였던 모양이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 다행히 몸은 시간의 흐름을 모두 흡수하지는 않았나 보다. 한 시간이 안 되는 아침운동으로 큰 깜짝 선물을 받았다. 달리기의 효능을 깨닫고 보니 몸과 마음 모두가 참 상쾌하다. 묘한 성취감과 자신감이 자생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운동을 하면 체력이 향상된다. 기초체력의 향상은 일상생활에 선순환을 가져온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애주가로 살면서 주락(酒樂)을 멀리할 수 없으니 운동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체중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알코올 해독에 필요한 근육이 필요하다. 해독을 모두 간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주인을 잘못 만난 '간'을 위해서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달려야 하니.
사진출처:by 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