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프라 입문
손해사정과 소송 업무를 중단하고, 영업 지점장으로 지원하고 난 후였습니다. 매출달성과 영업관리를 해야 하는 지점장이라는 자리는 그 자체도 참 어려운데, 더 어려웠던 것은 주먹구구식의 비상식적인 조직문화예요. 보상부서도 영업부서도 다 똑같은 보험회사입니다. 쏟아부었던 열정만큼의 크기 그대로 돌아오는 반복적 번아웃을 피하기 어려워요.
여느 때와 다름없던 평일 점심입니다. 명동역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시간이 좀 남아 우연히 아트박스에 들어갔어요. 3층 건물로 이루어진 대형매장답게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소품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특히 호기심이 가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건담 프라모델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멍하니 앞에 한참을 서서 이것저것 모델을 집어보며 남은 점심시간을 보냈어요. 어렸을 때의 동심이 떠올라 좋았습니다. 결국 4만5천 원을 주고 RG 모델을 하나 샀어요.
<제일 좋아하는 퍼스트 검담. 처음으로 구매한 녀석>
충동구매로 가져온 건담인지라 첫 조립을 시작한 건 한 달 후였습니다. 책상 위 제 자리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평소에 늘 신경 쓰였는데 마침 일요일에 여유가 좀 생겼어요. 어? 근데 이게 예전의 프라모델 조립이 아닙니다. 부속들의 정교함이 상당해요. 그 작은 부품들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자리로 착착 자리합니다.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이 예상보다 상당해요. 그렇게 관절을 만들고, 몸통을 만들면서 반나절 정도를 보내고 나서야 드디어 하나의 모델을 완성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입니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조직과는 다르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돼요. 통제가 가능합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조립 과정에서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정도예요.
살다 보면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유독 힘든 날이 있습니다. 정확한 예측과 방향이라 생각하고 설정한 길인데, 막상 길을 걷다 보면 틀릴 때가 있어요. 사람들에게 보낸 존중의 모양과 크기가 나에게 돌아올 때는 너무 많이 깎이고 깨져서 본래의 그 모양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많아지고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중첩되면서, 당연하듯 번아웃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와요.
첫 조립에서의 편안함을 만난 이후로는, 복잡한 생각이 들 때마다 어김없이 건담을 꺼냅니다. 킬링타임 그 이상의 의미예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건담 조립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많이 유연해짐을 느낍니다. 명상 같다고 할까요? 생각을,마음을 비우게 됩니다.
괜히 또 무엇인가 해야만 하는 일을 만드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도 했어요. 기우였습니다. 완벽한 조립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은 결코 부담감이 아닙니다. 완성된 건담의 관절을 움직이며 자세를 잡아보는 단순한 토이로써도 좋아요. 저는 40대지만, 아직 장난감이 필요합니다.
회사 스트레스로 분노조절에 어려움이 많을 때였는데, 감정 조절에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언행에 대해서 쉽게 넘기지 못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나 같은 유리멘탈에게 건프라 작업시간은 명상과 같은 편안한 시간이에요. 차분하게 보내는 시간을 통해서 만드는 마음의 여유로 또 다른 채움을 준비할 수 있거든요.
3년 조금 넘게 만들어 오고 있는데, 건프라 조립은 여전히 참 편안한 취미생활입니다. 소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도 재미가 있을 거예요. 건프라가 비움이라는 것이 다소 역설적이지만, 저 같이 감정 조절에 애를 먹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비움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될 겁니다.
<하나 둘 조립하다 보니 지금은 한국시장에 나와 있는 RG모델은 모두(거의) 가지고 있습니다.>
<<퍼스트 건담 HG, RG, MG, PG 등>>
검담은 모델에 따라 가격차이가 있습니다. 하나의 모델을 조립하는 데 드는 시간도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에요. 간단하게 조립만 할 수도, 조립을 넘어 도색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초보자의 경우에 굳이 고가의 모델을 구입해서 며칠의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겠지요. 해야만 하는 숙제로 다가오는 순간, 그것의 즐거움은 퇴색될 거예요.
우리의 삶이 꼭 문제를 풀고 답을 제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답이 아닌 각자의 명답을 찾아가는 게 우리의 하루 아닐까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힘든 날. 마음이 조금 복잡한 날. 집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보통의 우리 어른이들은 그 시간을 채우기가 쉽지 않아요.
외부 자극에 민감한 스타일.
유독 스트레스 관리가 잘 안 되는 유형.
선계획 후실행 고집하는 완벽주의형.
아기자기 이쁜 것들 소장 좋아하는 어른이.
그리고 예전 꿈 많았던 아재들.
어느 누가 하더라도, 많은 재미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간단 요약>
종류 : HG -> PG -> MG -> PG (오른쪽으로 갈수록 비싸지고 정교해짐)
가격 : 25,000 원 ~ 300,000 원
추천 : 4,5만원대 PG (남성 성인 손바닥 크기)
구입 : 건담베이스 (용산 아이파크, 코엑스 등), 아트박스 (규모 좀 큰 곳), 대형 마트
※23년11월 현재 스타필드 고양점 건담베이스 샾이 참 아름다습니다. 모델 전시도, 판매 가능 모델도 가장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