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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 Mar 07. 2024

단상

화가 날 때는 최대한 중저음으로 말하고

손해사정사 업무를 하면서 참 많은 민원인을 만났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니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직업군을 만난 샘이다. 삶 위를 걷다 보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억울한 것도 많고, 화가 나는 것들도 참 많다.


나는 민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에 민원인들에게 시달린 탓이 크다. 많이 맞아 봤기 때문에 어디가 아픈지도 잘 안다. 어떻게 하면 민원인을 가장 괴롭힐 수 있는지 역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민원을 넣지 않는다. 힘들어했던 내가 자꾸 떠올라 그냥 피해버리고 말뿐이다. 내가 당했던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만큼 비열한 것이 없다.


사실이 그러해서 욕을 먹으면 그것은 사실이니 성낼 것 없고
사실이 아닌데도 욕을 먹으면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때나 분노하지 않는다.

<잡보장경>중에서


민원을 처리하다 보면 간혹 간단한 착오나, 오해로 인해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민원인도 담당자도 같은 실수를 하는데, 하물며 민원이라는 것이 좋아하는 친구와 나누는 대화 따위가 아니다. 착오나 오해가 있었다며 사과하고 끝낼 수는 없다. 대화라는 빠른 길을 포기했으니, 이제 감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본질은 잊고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것이다. 가족, 지인과의 대화에서도 다르지 않다.


내 잘못이 클수록 목소리도 커진다. 나는 그래서 화가 나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낮은음을 선택한다. 큰 목소리에 놀라 그나마 남아있는 이성(理性)이 나를 떠나가 버리지 않도록 몸도, 목소리도 낮춘다. 감정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사과하는 것과 사과를 받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행위다. 내 잘못은 인정하고, 타인의 잘못에는 관대해야 하니 보통 마음이 넓지 않고서는 쉽게 행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사과하는 연습을 종종 해보곤 한다.


김포 공무원 기사를 보고 나니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다.


익명이라는 탈을 쓴 자들의 손가락이 또다시 인명을 해쳤다.

우월한 직책에 자리한 무능한 관리자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분명히 30대의 말단 공무원이 짊어질 잘못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직으로부터 책임자, 관리자라는 타이틀을 받은 자는 그에 합당한 높은 보수를 받는다. 실무자에 비해 턱도 없이 적은 노동을 하지만 오히려 높은 급여를 받는 이유는 의사결정권자의 책임감 때문이다. 고인이 속한 조직의 관리자들이 과연 그에 맞는 책임감을 보였을지 의문이다. 혼자서 감내했을 고인의 답답함이 전해져서 가슴이 너무 먹먹하다.


신상을 카페에 공개하며 마녀사냥의 단초를 제공한 그자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극단적인 시도를 할 줄은 몰랐다며 되려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까?

행여 미필적 고의를 근거로 처벌에 대한 감형 사유들을 검색하고 있지는 않을까?


대한민국은 민원공화국이다.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본래 취지는 퇴색되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그 심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극한의 이기심은 잘 베린 칼날이 되고, 깊은 송곳이 되어 피해자를 향한다.


안타깝다. 참으로 안타까운 인재(人灾)다. 안타까운 기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흑화되어 마음을 더 닫게 된다. 저녁시간 도심으로 찾아온 어둠이 편안하다. 오늘 밤만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모두 어둠안에 잠들었으면 좋겠다.


故人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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