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두지 않는 오늘
지난해 4월 아빠가 돌아가신 뒤 유품이 많지 않다는 것이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휴대폰과 옷가지 몇 개, 소일거리이던 그림과 필사 몇 편이 전부였다. 정리해야 할 서류도 많지 않았다.
우리 아빠는 이렇게 단촐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한편으론 서글프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사진 몇 장으로 가족들이 아빠를 강렬하게 기억할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빠 손길이 닿은 그림, 글씨체 사진 한 장으로 아빠를 추모하고 기억하고 또 사랑하기에 충분했다.
저장하지 않는 삶. 껴안고 있지 않는 삶. 그때그때 털어버리고, 빈 공간엔 새로움이 깃들 수 있게 하는 삶.
나는 C 브랜드 수분크림을 좋아한다. 홈쇼핑에서 대량 구매하면 저렴해서 한 번에 10개씩 샀다. 너무 많은데? 에이, 가족 친구들에게 선물하지 모. 생각해보면 웃긴다. 친구 가족들 입장에선 수요 없는 공급 아닌가. 실제로 많이 나눠줬지만 피드백은 달랑 1개만 받았다. 새로 나온 크림을 발라볼 마음의 여유도 없다. 집에 C 수분크림이 7개나 있으니까.
저장 안 해.
언젠가 가족들이 내 남은 짐을 정리하러 우리 집에 오는 날,
"아니 얘는 무슨 물건을 이렇게 쌓아두고...
쓰지도 못할 걸 왜 이렇게...
몰랐겠지, 이렇게 두고 갈 줄은..."
이런 말을 듣지 않도록 사는 게 최근 작은 목표가 됐다. 강렬한 장면 하나, 물건 하나로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이전 만큼 대량 구매를 하지 않으니 돈이 더 든다. 그러나 얻은 게 있다, 크림 한 번 짤 때마다 대량 구매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한 번의 향, 감촉, 효과에 집중하게 된다. 언제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크림 바르는 10초가 소중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크림도 이럴진대, 쌓아두지 않는 오늘은 얼마나 더 선명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