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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자가당착 (自家撞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모순되는 상황.

by 싱숭생숭

나는 오래도록 스스로를 결핍으로만 설명하며 살아왔다.

그 말은 단순한 자기평가가 아니라, 나를 규정하는 가장 확실한 언어처럼 굳어 있었다.

내가 가진 언어와 감정, 시선과 깊이까지도 모두 “상처가 만들어낸 부산물”이라고 믿어왔다.

마치 내 존재가 고통의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듯,

내가 말하는 모든 문장,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은 결국 결핍의 그림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 지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듣고 불쑥 “정말 좋은 사람 만날 것 같아”라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했다.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흘려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 귀는 분명 그 문장을 들었지만, 내 머리는 한동안 그 의미를 해석하지 못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고, 내 안에서는 어떤 오래된 틀 하나가 미세하게 금 가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목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건네는 형식적인 위로나 예의상 던지는 칭찬과는 달랐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무겁게 가라앉아,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 무게를 견디며 알았다.

내가 그동안 결핍을 증명하듯 살아온 동안,

어쩌면 누군가의 눈에는 전혀 다른 결로 비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괜찮다고,

심지어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내 사고의 지도에 없었다.


나는 늘 스스로를 무너진 존재로만 여겨왔다.

울음을 삼키며 버틴 날들,

감정에 휩쓸려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저 부끄러운 서사로만 간직해 왔다.

그 기억은 내게 언제나 감추고 싶은 과거였고,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꺼내지 않을 흉터였다.

그런데 그녀의 말 한마디가 그 기억들을 다른 빛으로 비추었다.

마치 오래된 상처 위로 스며드는 빛처럼,

그 말은 내 고통의 장면들을 다시 불러내면서도 동시에 낯설게 바꾸어놓았다.


“네가 살아온 방식 자체가 이미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일지도 몰라.”

그 다정한 시선은 내가 만든 좁은 틀을 흔들었다.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선언처럼 다가왔다.

나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순간 나는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믿어왔다.

상처를 지나야만 깊이에 닿을 수 있다고,

결핍을 견뎌야만 통찰에 도달한다고.

그 믿음은 내 삶을 설명해주는 유일한 법칙처럼 굳어 있었다.

허무하게도, 나는 고통을 통해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언어는 전부 결핍에서 태어난 것이고,

내가 붙잡은 감정은 전부 상처의 부산물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게 걸어왔고,

그럼에도 내 곁에 서서 비슷한 자리의 사유에 도달해 있었다.

그 사실은 충격이자 해방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상처만이 사람을 깊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나의 깊이를 전부 상처로만 증명하려 했다는 사실을 직면했다.

어쩌면 나는 그 믿음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안의 예민함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늘 “너무 예민하다”는 말로 낙인찍혔던 나의 감각들.

사람들은 쉽게 잊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자극들을

나는 오래 붙잡고 곱씹었다.

버스에서 들려오는 낯선 대화 소리,

강의실 문이 닫히는 작은 쾅 소리,

심지어 누군가의 휴대폰 알림 진동마저

내 하루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작은 소음 하나에도 나는 온몸이 휘청거렸고,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도 심장은 빠르게 요동쳤다.

말은 지나가도, 그 말이 남긴 울림은 밤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 예민함을 평생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왔다.

사람들 속에서 웃는 척했지만,

내 안에서는 늘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그 떨림은 내 귀와 가슴, 손끝까지 번져

몸 전체가 긴장으로 얼어붙게 했다.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보니,

그 예민함은 단순한 약점만은 아니었다.

나는 눈빛 속의 미세한 떨림을 읽었고,

침묵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감지했으며,

음악의 미세한 진동에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에겐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내겐 온몸으로 파고드는 거대한 파동이었다.


글을 쓰며 내 감정을 해체하고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 민감성 덕분이었다.

나는 다른 이들이 지나친 고통을 붙잡아 기록했고,

다른 이들이 외면한 울음을 대신 흘렸으며,

그 과정에서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민함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내가 버티고 견디게 한 힘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내가 약해서 흔들린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리듬이 남들과 달랐다는 것을.

둔감함이 미덕이라면,

예민함은 또 다른 힘이었다.

위험을 먼저 감지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명하며,

보이지 않는 균열을 감각해 낼 수 있는 힘.

그것이야말로 내가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남게 한 방식이었다.


나는 여전히 쉽게 무너진다.

낯선 자극 하나, 무심한 말 한 줄,

예상치 못한 일정의 변화만으로도 하루 전체가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책망했다.

“왜 이렇게 약할까, 왜 이렇게 흔들릴까.”

거울을 보며, 공책에 낙서를 하며, 심지어 걷다가도 중얼거렸다.

책망은 곧 습관이 되었고, 습관은 나를 점점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세상은 둔감한 사람을 선호한다.

빨리 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제의 상처를 오늘의 농담으로 바꾸는 능력을 미덕처럼 여긴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늘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삐져나와 있었다.

그 삐져나옴은 부끄러움이 되었고,

부끄러움은 다시 자기혐오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 삐져나옴이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내가 가진 고유한 리듬이라는 것을.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은 속도로 걷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결을 감각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약점이라 부를지 몰라도,

내게는 그 약점이야말로 세상을 더 세밀히 보는 창이었다.


위험을 먼저 감지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명하며,

보이지 않는 균열을 감각해 내는 힘.

그것이야말로 내가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힘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었다.

그 감각은 나를 살아남게 했지만,

동시에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남들이 취업 준비와 연애, 일상적인 이야기를 웃으며 나눌 때,

나는 홀로 존재와 죽음, 모순과 허무 같은 질문을 붙잡았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머리가 멈추질 않았기 때문이다.

구조가 보이고, 연결이 보이고,

끝없이 생각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나를 똑똑하다 했지만,

나는 그 똑똑함 때문에 더 많이 무너졌다.


밤이면 눈을 감아도 머릿속은 소음으로 가득했다.

강의실에서 들었던 말, 누군가 흘린 농담,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뒤섞여

심장 박동과 같은 속도로 머릿속 벽에 부딪혔다.

침대 위에서 눈물조차 말라버린 순간,

내가 느낀 것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허무였다.

잠은 도망가고, 새벽의 공기만이 내 폐를 차갑게 채웠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핍을 겪으면 빠르게 단단해졌다.

가난을 겪으면 돈 버는 법을 배우고,

상처를 받으면 감추는 법을 익히며,

그렇게 현실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체득한다.

그들의 성숙은 투박하지만 현실적이다.

그래서 덜 무너진다.

그 단단함은 삶의 기술이자 생존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현실적 단단함은 없고, 대신 고통과 질문만 남았다.

그 질문은 축복이라 하기엔 버거웠고,

저주라 하기엔 버리기 아까운, 애매한 선물이었다.

그 선물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면서도,

동시에 글을 쓰게 하고, 사유를 이어가게 했다.

나는 그 선물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그 선물 때문에 수없이 고통받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 알게 되었다.

사람마다 성숙의 길은 다르다는 것을.

누군가는 현실 속에서 단단해지고,

누군가는 고통 속에서 성숙한다.

그리고 나는 후자였다.

내가 얻은 성숙은 현실적 단단함이 아니라,

허무와 모순 속에서 질문을 곱씹으며 만들어진 성숙이었다.

그 성숙은 늘 불안정했고,

나를 붙잡는 동시에 나를 옭아매는 방식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고통 속에서 성숙해 왔다.

그러나 그 성숙은 언제나 불안정했다.

내가 붙잡은 질문들은 나를 지탱하면서도 동시에 무너뜨렸다.

끝없이 곱씹고 되새겼지만, 그 질문들은 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몰아갔다.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30층 건물 난간 위에 서 있던 그 순간을.

두 손으로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떨리는 발끝으로 허공을 내려다보던 그때,

내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이성은 이미 감정에 압도당해 있었다.


바람은 뺨을 스쳤다.

밤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발 아래로는 도시의 불빛이 아득히 흩어져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은 또렷하지 않았고,

내 귀에는 오직 내 심장 박동 소리만이 가득했다.

나는 그 순간, 살아야 할 이유와 살아선 안 될 이유를 동시에 붙잡고 있었다.

내 손바닥에서는 땀이 흘러내렸고,

금속 난간은 미끄럽게 차가웠다.

발끝은 저릿했고, 다리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끝에서, 모순을 보았다.

살고 싶음과 죽고 싶음이 한 자리에 겹쳐 있었다.

나는 동시에 두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몸을 끌어올렸지만,

그 경험은 내 안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나는 다시는 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자해를 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날의 나는,

몸을 파괴하고 싶었던 절박함의 본질을 알았다.

그 본질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다.

차라리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눈앞의 상처로 바꿔,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환하고 싶었던 욕망이었다.

피가 흘러야만, 그 피가 내 고통을 대신 설명해 줄 것만 같았다.

상처가 생겨야만, 그 상처가 내가 얼마나 아픈지 증명해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자해라는 행위를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그 속에서,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던 몸부림을 본다.

자살은 삶 전체를 끊어내려는 시도라면,

자해는 살고 싶음과 알아달라는 간절함이 섞인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양날의 검이었다.

피는 멈추더라도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스스로를 옥죄는 증거가 된다.

거울 속에서, 소매를 걷을 때마다,

상처는 과거를 다시 불러온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자기 확신이 강화된다.

자해는 고통을 덜어내기보다,

고통을 되새기는 굴레가 된다.


나는 그 모순을 안다.

살고 싶기에 택한 방법이 오히려 더 깊은 죽음을 불러온다는 것.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 행동이 오히려 더 단단한 쇠사슬이 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자가당착이었다.


사람들은 자해를 약하다고, 극단적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그 말들은 칼날이 되어,

자해한 사람의 가슴을 더 깊이 찌른다.

그 시선 속에서 그들은 더 확신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 자해할 수밖에 없다.”

그 자기 암시는 곧 감옥이 된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건 단순히 죽음을 원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저 절박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싶었던,

살고 싶었던,

알려지고 싶었던 몸부림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극단적 감정에 몰렸을 때,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자해라는 도피인가, 아니면 직면이라는 선택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나와 같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네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알아.

그건 단순히 죽고 싶어서가 아니야.

살고 싶어서, 견디고 싶어서,

다른 방법을 몰라서 네 몸을 택한 거야.


피가 흘러야만 고통이 잠시 멎고,

상처가 생겨야만 누군가가 네 절망을 눈으로 확인해 줄 것 같았겠지.

그게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아.


하지만 동시에 말하고 싶어.

그 방식은 너를 더 묶어.

상처는 고통을 덜어내지 않고, 오히려 더 깊게 각인해.

네 몸에 새겨진 흔적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아.

매번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너는 다시 과거의 절망 속으로 끌려가게 돼.


그러니까, 제발 기억해 줘.

자해는 죽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야.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버티고 싶어서,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아서 선택한 거야.


그 사실은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네가 절박했기 때문이라는 증거야.

그 절박함은 네가 여전히 살아 있고 싶다는 신호야.”



나는 이 말을 더 길게 이어가고 싶다.


“아직 다른 길이 있어.

그 길은 덜 극적이고, 덜 눈에 띄고,

때론 더 버거울지도 몰라.

하지만 그 길을 걷는 동안,

너는 더 이상 몸을 찢지 않아도 돼.


너의 고통은 이미 충분히 진짜야.

굳이 더 증명하지 않아도 돼.

네가 무너질 때, 그 무너짐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네 떨림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러니 제발, 너의 절박함을 상처로만 남기지 마.

그 절박함을 글로, 말로, 눈빛으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기를.

네가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음을,

그 방식으로 스스로 확인할 수 있기를.”


나는 여전히 쉽게 무너진다.

여전히 고독 속에서 질문에 잠식된다.

그러나 동시에 안다.

내가 무너지는 순간조차,

그 속에는 살고 싶다는 불씨가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불씨를 붙잡아 글로 쓰고,

다른 이들과 나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자해 대신 택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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