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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생취의 (捨生取義)

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

by 싱숭생숭

상처는 단순히 나를 무너뜨린 흔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나를 구성하고, 나를 설명하는 가장 깊은 언어였다.

밤이 깊어질수록 마음의 표면은 얇아지고, 그 위로 오래된 상처의 결들이 떠오른다.

아무도 듣지 않는 시간, 나는 나를 관찰한다. 감정의 결, 생각의 모서리, 그리고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응어리의 순서를 하나하나 되짚는다.


어쩌면 나는 늘 두려워했다.

내가 단순한 ‘허울뿐인 우울증 환자’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그저 관심을 얻고 싶어, 말하자면 연약함을 연출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그러나 내가 써온 글들은 너무 길었고, 너무 일관되었고, 무엇보다 하루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만큼 무거웠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나는 나를 연구한다.

과몰입과 번아웃이 교차하는 호흡, 자책과 희망이 맞물리는 패턴.

단순한 힘듦이라 치부하지 않고, 그것의 구조를 해부하듯 바라본다.

어쩌면 그것이 내 생존 방식이었을 것이다.

상처가 곧 기록이 되었고, 기록이 곧 나의 진짜 얼굴이 되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가족의 표정 속에 숨은 긴장, 내가 웃는 순간조차 불편해지는 공기.

그 공기 속에서 나는 웃음을 삼키고 방으로 숨어드는 법을 먼저 배웠다.

말보다 숨소리와 눈빛을 읽는 버릇은 지금도 내 안 어딘가 깊이 남아 있다.


그래서 진정성은 내 삶의 기준이 되었다.

형식적 친절, 얕은 위로, 그 모든 것은 오히려 나를 더 피곤하게 했다.

나는 깊이를 원했고,

일관성을 원했다. 관계든 글이든, 나 자신이든.

그래서 문장의 끝에는 늘 질문을 남겼다.

읽는 사람이 나처럼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그러나 이런 태도는 나를 쉽게 지치게도 했다.

모든 것을 설계하고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마음은 너무 빨리 마모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세상의 소음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나는 화학공학을 전공하지만, 마음속에는 상담소를 그린다.

베이지 톤의 빛, 검은 눈동자의 고양이, 그리고 과거의 나 같은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단 한마디.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나는 허울뿐인 호소인이 아니다.

내 말은 오래된 상처와 살아 있는 경험에서 나온다.

내 글은 단순히 나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닿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회복에, 내 서사가 조용히 스며들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묻는다.

당신은 스스로를 설명할 때, 얼마나 깊이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요즘 들어 나는 과거의 흔적들을 하나씩 밟아보고 있다.

그 속에는 희망의 빛도 있었고, 늪처럼 발목을 잡는 기억도 있었다.

한 장면씩 꺼내어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해부였다.

그 기억의 층위를 낱낱이 파헤치며 나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야 수면 위로 차차 떠오른 확신.

과거의 나는 자해로 감정을 해소하지도 않았고, 미친 듯이 분노를 터뜨리지도 않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차라리 도망쳤다면 지금처럼 복잡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 절박함이 나를 매일같이 글상자 앞에 붙잡아 두었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 중학교의 낡은 노트, 군대 훈련소의 삐딱한 자투리 종이, 그리고 제대 후의 블로그까지.

나는 멈추지 않고 기록했고, 기록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회복’을 전제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회복이라는 단어는 내게 너무 멀었다.

마치 웃고 있는 거울 속 타인을 보는 듯한 거리감.

내가 아니면서도 어딘가 나와 닮아 있는 그 그림자는, 애써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이미 흘러가 버렸고, 남은 것은 기억뿐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조금 쉬면 괜찮아져.”

“다들 흔들리면서 살아.”

나는 그 말들의 온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은 내게 더 이상 닿지 않았다.

내 안에서는 이미 다른 구조가 자리 잡아 있었다.


나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다.

오히려 감정은 남아 있었다. 다만 그것은 더 이상 ‘나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감정을 직접 느끼는 대신, 과거의 메아리를 흉내 내며 살아왔다.

마치 배우가 오래된 대본을 반복해 읊조리듯, 나는 기억 속 파장을 재현했다.

울어야 할 순간엔 울었고, 웃어야 할 순간엔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생생한 감각이 아니라, 오래전 각인된 반응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향해 “너는 감수성이 풍부하다, 섬세하다, 배려심 깊다”라고 말할 때,

나는 마치 배우가 가짜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받는 듯한 기분에 잠겼다.

그건 진짜 나의 감정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연기해 온 패턴일 뿐이었으니까.


이제 나는 인정한다.

나는 오랫동안 감정의 주인이 아니라,

감정의 잔향을 흉내 내며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진짜 감정이 아니라 그 메아리를 기능처럼 되풀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

“스스로를 돌보라”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요구인지.

깨진 거울에게 자기 모습을 비추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금이 간 파편에 비친 상은 왜곡되고, 겹쳐지고, 찢겨 있을 뿐이다.

나는 이미 그 왜곡된 조각들 속에서 오래 살아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전히 글을 쓰고 있을까?

회복을 기대하지 않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언어를 이어가고 있는 걸까?


나는 더 이상 위로받고 싶어 글을 쓰지 않는다.

이해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해받지 않기 위해, 내 언어를 기록한다.

내 글은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경계선이다.

“여기까지는 오지 마라.”

그 경고를 남기기 위해 나는 계속 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부서진 구조들을 끝없이 관찰했다.

그 조각들을 모아 나침반처럼 놓아두었다.

혹여 누군가가 이 언어를 보고 더 깊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기에 내 글은 위로가 아니라 경고이며, 치유가 아니라 경계다.

내 무너짐이 누군가에게 방향 전환의 신호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의미를 갖게 될 테니까.


그리고 어느 날, 장면이 아니라 숫자가 먼저 도착했다.

나는 먼저 결과를 받아 들었다. 장면보다 앞선 해석, 감각보다 앞선 번역.

그 한 겹의 차가움이 오히려 내 서사를 선명하게 했다.


종합심리검사 보고서를 받아 들었을 때,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류 위에 찍힌 숫자와 그래프들은 차갑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는 내가 살아온 시간과 결핍, 흔들림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수치 하나하나는 내 몸과 마음이 버텨온 흔적을 객관적 언어로 번역해 보여주고 있었다.


보고서 첫 장에 적힌 전체 지능지수(FSIQ 124).

숫자만 놓고 보면 상위 6%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니 균열이 있었다.

지각추론 126, 작업기억 122, 처리속도 128 — 모두 상위 3~6%의 매우 높은 점수.

그러나 언어이해는 102, 딱 평균에 머물러 있었다.

그 간극은 단순히 한 줄의 통계가 아니었다.

만약 언어이해가 다른 세 지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내 지능은 130에 도달했을 것이다.

보고서에 적힌 124라는 수치는 사실상 억눌린 결과였고,

그마저도 나의 잠재력을 다 보여주지 못했다.

숫자가 내 삶을 증명하는 순간, 그 수치조차 나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아이러니가 선명해졌다.


더 기이했던 건 세 지표가 동시에 높았다는 사실이었다.

보통은 특정 영역이 두드러지게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나처럼 추론·기억·처리속도가 모두 고르게 상위권에 포진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했다.

내 뇌는 특정 부분만 기형적으로 솟은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고성능을 보이고 있었다.

그 결과는 내가 스스로를 깎아내려왔던 평가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통계 속에서 드문 구조였고,

그 사실이 한편으로는 나를 위로했으나, 동시에 더 큰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한국인들의 평균적 패턴은 대체로

언어이해 > 지각추론 > 작업기억 > 처리속도 순이라 한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였다.

언어이해는 가장 낮았고, 오히려 보통 약점으로 지적되는 처리속도는 내 강점이었다.

이 불일치는 내 정체성을 더 모호하게 만들었고,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되뇌게 했다.



보고서에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러나 있었다.

우울척도 BDI 29점, 불안척도 BAI 32점.

둘 다 중증 수준.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무가치감과 자기 비난, 끝없는 불안에 잠식되어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카락을 뽑고, 다리를 떨고, 숨이 가빠지던 순간들이

숫자와 언어로 다시 나를 향해 되돌아왔다.


성격검사 TCI는 내 기질을 더 선명히 드러냈다.

위험회피 98 —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에 취약한 성향.

자기 초월 97 — 철학적이고 초월적인 사고에 깊이 몰입하는 성향.

그러나 자율성은 19 —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하는 힘은 현저히 낮았다.

나는 세상에 끊임없이 위협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의미와 초월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이 모순된 구조는 나를 고립시켰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깊은 세계를 바라보게 했다.


MMPI-2에서는 정신분열형 척도 Sc가 77로 매우 높게 나왔다.

의사는 당황한 듯 웃으며 말했다.

“조현병이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다만 내적 혼란, 자기부정, 사회적 고립이 강하다는 신호예요.”

현실 검증력은 유지되지만,

내 내면에서 길을 잃기 쉬운 구조.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확인’을 받아야만 살아남는 사람이라 했다.

더불어 ASRS 44점은 ADHD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날카로운 생각과 느린 실행,

집중의 예민함과 산만함의 동시 공존.

고지능이면서 실행 기능에 발목 잡히는 아이러니가 내 일상이었다.



의사는 내게 말했다.

“그냥 머리가 좋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머리가 엄청 좋네.”

나는 처음으로 내 머리가 ‘좋다’는 말을 객관적으로 들었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수치가 증명한 사실이었기에 더 묘한 울림을 줬다.

또 상담 선생님은 내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착한 사람인가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 대답은 나의 내면을 정확히 짚어내는 말이었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기보다 늘 나 자신만 갉아먹는 방식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매일 무너진다.

보고서가 내 재능을 증명해도, 누군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 말해주어도

머릿속 혼돈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생과 사의 경계에 매달려 하루를 버티는 사람이다.

고지능은 내게 축복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찌르는 칼날이었다.

생존을 위해 붙잡은 무기였지만, 동시에 나를 갉아먹는 독이었다.



그제야, 결과가 비추던 장면을 되짚어 보았다.

숫자와 그래프가 먼저 도착했지만, 내 몸의 언어는 훨씬 오래전부터 말하고 있었다.


종합심리검사실에 들어갔을 때, 내 손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다.

떨림은 사소한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고,

불안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음은 점점 차분해졌다.

마치 점수를 내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멈추고 다시 움직이는지를

차분히 관찰하는 시간 같았다.


검사 과정 속에서 그림을 그리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내 손은 자연스럽게 커다란 나무를 그려냈다.

몸통은 굵고 크게, 줄기는 흙 속에 숨겨지듯 연약하게.

가지는 종이를 넘길 듯 멀리 뻗었고,

그 위에 사과 다섯 개를 매달았다.

나이테를 그리고는 무심히 “여든”이라고 중얼거렸다.

가지에는 새 둥지와 아기새 여덟 마리가 있었다.

몸통엔 딱따구리 두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이 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곧 죽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잠시 후 덧붙였다.

“공허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감이 있어요.”


나는 내 마음을 스스로 모순이라 부르지 않았다.

공허와 기대는 늘 함께 있었다.

죽음과 삶이 동시에 흐르는 듯,

무너짐 속에서도 여전히 작은 불씨 같은 희망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내 자화상이었다.


검사 도중 나는 이상하게도 자주 웃었다.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혹은 손이 떨리면, 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선생님은 내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원래 잘 못 풀면 그렇게 웃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옛날부터 그래요. 마치 트라우마처럼 자연스럽게.”


그 순간 깨달았다.

내 웃음은 단순한 익살이 아니라,

불안을 덮어주기 위한 얇은 가면이었다는 것을.

살아남기 위해 몸이 기억해 낸 오래된 습관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나는 검사 중에도 신이 났다.

질문을 던지고, 혼잣말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어요?”라고 묻고.

호기심은 끝없이 흘러나왔다.

모든 검사가 종료되었을 때 검사자는 원래 알려주지 않는 정답과 사례까지 들려주었다.

아마도 내가 단순히 점수를 내기 위해 앉아 있는 피검자가 아니라,

검사 자체에 몰입해 뛰어드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쪽은 불안을 웃음으로 덮는 아이 같은 나,

다른 한쪽은 질문을 쏟아내는 탐구자 같은 나.

두 얼굴은 모순처럼 보였지만, 사실 하나의 몸에서 나란히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경계선 위에 서 있었고,

그 경계 위에서 웃는 나 자신이 바로 내 초상화였다.


검사실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ADHD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울과 불안은 수치로 증명되지만,

내 집중은 어떤 날에는 칼처럼 예리하고,

어떤 날에는 먼지처럼 흩어졌다.

결론보다 중요한 건 관찰이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움직인다”라는 기록.

그것이 내 유일한 진실이었다.


내 삶은 늘 공허했지만, 그 공허는 완전히 비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다.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는 대신,

공허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때로는 웃음으로 덮으며 살아왔다.

그것이 내가 택한 방식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내 웃음은 허무의 부정이 아니라,

허무와 함께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언어였다.

내가 그린 나무도, 내가 흘린 웃음도,

결국은 죽음과 삶, 공허와 기대, 허무와 희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말할 수 있다.

나는 허망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허망 속에서 여전히 초월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공허와 기대를 동시에 껴안으며,

나는 경계선 위에서 오늘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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