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힘.
미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먼저 부끄러움이 올라온다. 집 안에서도 나는 서툴고, 중요한 말은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 약을 먹는다는 사실조차 망설이며 넘긴다. 그래서 자주 묻는다. 이런 내가 타인의 무너짐을 받아낼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질문을 오래 들여다보니, 서툼이야말로 윤리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아는 척하지 않기, 서두르지 않기, 상대의 속도를 앞지르지 않기. 미완이라서 가능한 멈춤이 있고, 그 멈춤이야말로 상담실에서 지켜야 할 첫 번째 약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보다 글이 편하다. 문장 사이의 공백은 즉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상담실에서도 결국 지켜야 하는 건 그 공백과 여백이다. 침묵을 서둘러 해석하지 않고, 설명 대신 함께 머문 시간을 인정하는 일. 어쩌면 내가 가진 힘은 완성된 해답이 아니라, 아직 결론에 닿지 않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체력에 가깝다. 미완의 체력. 끝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설명되지 않는 채로 흘러가는 시간을 버티는 힘.
방 밖의 현실은 이 느린 호흡을 시험한다. 공대·이과·남자라는 표지들은 안정과 책임의 프레임을 들고 와 나를 재단한다. ‘확실히 말해라, 빨리 결정해라, 성과를 보여라.’ 그 외침 속에서 나는 자주 걸음을 멈춘다. 가까이 가면 침범이 될까 두렵고, 멀어지면 방치가 될까 또 두렵다. 윤리는 옳고 그름의 깃발보다 하중 배분의 기술에 가깝다. 시간·에너지·감정·돈, 이 네 가지를 어디에 얼마나 얹을지 정하는 일이 곧 관계의 모양을 바꾼다. 한쪽을 가볍게 하면 다른 쪽이 내려앉는다. 그래서 선의만으로는 모자라다. 좋은 마음보다 좋은 거리가 필요하고, 좋은 말보다 견딜 수 있는 구조가 먼저다.
윤리를 배운다는 건, 사실 정답을 갖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불균형 속에서, 몸이 먼저 무너져 내려가는 순간을 수없이 견디며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 언제 멈추어야 하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만이 끝까지 붙들 수 있는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미완이라는 낙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내 직업적 기반이 될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완벽하게 닫힌 자리에선 질문이 사라지지만, 미완의 틈에서는 질문이 끝내 살아남기 때문이다.
상담실에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책으로 낼 생각 없나요? 인상 깊은 문장은 따로 적어뒀어요.”
그 말이 방 안에 남았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따뜻함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내 문장이 누군가의 손끝에 옮겨 적혔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되었지만, 동시에 관계의 초점이 아주 조금 이동하는 걸 알아챘다. ‘지금 이 자리는 수용의 자리였는데, 방금은 성취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구나.’ 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작은 흔들림이 어디로 이어질지 오래 바라보았다.
윤리라는 건 거창한 깃발보다, 사실 이런 순간의 미묘한 기울기를 놓치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 같다. 따뜻한 말도, 경계가 풀리면 다른 무게를 데려온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막아내는 장벽이 아니라, 흘러갈 길을 만들어두는 일 같다. 물이 고이지 않고 흘러가도록 배수로를 내듯이. 그 순간부터는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서로 확인하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짚고, 다시 본래 자리로 어떻게 돌아올지 합의해야 한다. 온기를 막는 게 아니라, 온기가 스며들되 그릇의 형태는 그대로 남게 하는 쪽으로.
안전도 그렇다. 위기 신호 앞에서 비밀보장과 보호의 의무는 늘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긴다. 너무 빨리 개입하면 관계가 깨지고, 너무 늦으면 실질적 안전이 흔들린다. 그 사이에서 내가 붙드는 건 원칙의 구호가 아니라, 사전의 언어다. ‘왜 지금, 어디까지, 누구와.’ 그걸 미리 말해두면 적어도 불시에 무너지는 느낌은 줄어든다. 나중에 변명하는 말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윤리를 설득하지 못한다.
속도와 과정도 늘 부딪힌다. 숫자로는 보고할 수 있는 성과가 필요하지만, 실제 회복은 숫자가 아니라 몸의 감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내 기록을 세 겹으로 묶어두고 싶다. 속도는 보고서로, 과정은 일지로, 인간은 관계로. 보고서가 책임을, 기록이 맥락을, 관계가 인간다움을 지켜낼 때, 비로소 세 기둥이 서로를 붙잡아준다.
종결의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회복된 것 같아도, 놓아버리면 다시 무너질까 두렵다. 하지만 붙잡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놓아주는 쪽이 더 높은 윤리가 될 때가 있다. 상담자가 들고 있던 지지를 내담자의 일상으로 옮겨주는 것. “이제 당신의 시간표로 간다.” 그 말이 상처가 아니라 권한 위임이 되도록.
결국 다시 미완이라는 단어로 돌아온다. 모든 관계는 절반쯤만 완성된 자리에서 머문다. 닫아버리지 않고, 느슨함을 그대로 품고, 때로는 불편한 균형을 오래 견디는 자리. 그 미완이야말로, 내가 상담실에서 지켜야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 안의 감시자가 또 고개를 든다. 겁쟁이, 비겁자, 착한 척. 그 목소리는 늘 나를 무너뜨리면서도, 동시에 선을 넘지 않게 묶어둔다. 마치 벌과 보호가 한 몸으로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이상한 건, 이 아이러니가 없었다면 나는 훨씬 더 위험한 쪽으로 기울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만큼 자기 단속은 나를 살아 있게도 하지만, 너무 강하면 결국 시야를 조여버린다. 좁아진 시야 속에서 상대의 얼굴은 흐려지고, 내 안의 잣대만 커진다. 그래서 자기 돌봄이 곧 윤리라는 말을 자꾸 되새기게 된다. 오래가려면, 내담자를 지키는 기술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는 기술이 함께 있어야 한다. 상담 사이의 틈을 어떻게 둘지, 번아웃이 스며들지 않도록 어떻게 리듬을 잡을지, 관계 밖에서 관계를 점검할 수 있는 틀을 어디에 둘지. 그런 것들이 단순한 여유가 아니라 버팀목이 된다는 걸, 늦게야 깨닫는다.
밤이 되면 질문이 몰려든다.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안전이란 무엇인가. 대답은 오지 않고, 해답이 보이지 않을수록 질문은 같은 자리만 맴돈다. 그 원을 끝없이 돌다 보면, 잠은 금세 사라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불면의 시간에 문장은 더 잘 흘러나온다. 파괴의 이미지가 종이 위에 옮겨지는 순간, 그것은 구조가 되고, 구조가 된 이미지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억누르기보다 흘려보내는 쪽. 나는 언어로 충동을 해체하고, 문장으로 하루를 연장한다. 상담실에서 내담자가 하는 말도 그렇다. 제자리를 맴돌던 고통이 말로 모양을 얻는 순간, 그 고통은 방향을 가진다. 방향을 얻은 고통은 덜 무섭다.
하지만 늘 문제는 시선이다. 현실보다 앞질러 도착하는 건 언제나 타인의 시선이다. 아직 들리지도 않은 비난을 내가 먼저 상상하고, 그 상상에 맞서 나 자신을 미리 깎아내린다. 선제적인 낙인은 방패 같지만, 결국 오래 들고 있으면 내 얼굴이 된다. 윤리도 그와 닮아 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은 처음엔 든든한 방패처럼 보이지만, 곧 시야를 가리는 가림막이 된다. 그래서 원칙을 붙들되, 원칙이 가리는 것을 의심하려 한다. 내 기록을 그대로 열어두고, 슈퍼비전으로 사각을 드러내는 것. 독백만으로는 설득되지 않는 것을, 토론 속에서만 힘을 얻는 것을 조금씩 배운다.
그리고 결국은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내 안의 감시자, 불면의 밤, 언어로 겨우 버티는 습관, 원칙을 흔들며 균형을 찾는 몸짓. 전부 다른 얘기처럼 흩어져 있어도, 막상 붙잡아보면 한 뿌리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이 미완이야말로 윤리를 더듬게 하고, 그 윤리를 더듬는 동안 나는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회로처럼 느껴진다. 밤새 깨어 있다가 기절하듯 잠들고, 다시 비슷한 질문으로 깨어난다. 결핍—우울—질문—심상—기록—안정—다시 결핍. 이 반복은 지치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유지시킨다. 상담의 시간도 닮았다. 급격한 호전 대신 미세한 변동의 파동, 앞으로 한 걸음과 옆으로 반 걸음, 때로는 뒤로 한 걸음. 성장을 각도로 보지 않고 진폭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윤리는 단번에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라, 같은 파형을 무사히 여러 번 통과시키는 운영 능력에 가깝다.
나는 종종 도망치고 싶다. 도망은 가장 빠른 안도고, 직면은 가장 느린 구원이다. 그러나 직면의 순간에만 살아 있다는 증거가 생긴다. 그래서 결국 돌아와 앉는다. 도망과 직면의 왕복은 내 삶 전체에 배어 있다. 관계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고,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상담의 자리도 다르지 않다. 내담자의 시선과 내 불안을 동시에 견뎌내야 하는 이중의 긴장. 그때마다 나는 모순을 없애려 하기보다, 모순을 어떻게 관리할지 고민한다. 멈춤으로 속도를, 거리로 온기를, 기록으로 권력을, 종결로 애착을. 윤리란 결국 이 관리의 감각에 가깝다.
언젠가 누군가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이 손을 놓아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놓아줌이 떠넘김인지, 진짜 이관인지 분간하는 건 늘 어렵다. 나의 안도감 때문인지, 상대의 자율성 때문인지 자문하다가, 결국은 다시 물어야 한다. 지금의 이 결정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는 붙잡을 수도 있고 놓아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 선택이 관계 안에서 어떻게 합의되고 기억되는 가다. 놓아줌이 상처가 아니라 권한 위임으로 남을 때, 그것이야말로 내가 믿는 윤리의 형태다.
나는 여전히 서툴다. 그러나 서툼 덕분에 아는 척을 덜 하고, 속도를 늦추며, 여백을 지키고, 경계를 확인하며, 종결을 연습한다. 상담의 윤리는 단 한 번의 정답으로 닫히지 않는다. 언제나 미완의 상태로 남아, 그 미완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앉아, 질문을 적고, 말을 고치고, 관계의 무게를 다시 배분한다. 완전하지 않은 내가 완전하지 않은 내담자와 만나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조금의 온기와 충분한 그릇을 지켜내려는 반복뿐이다. 윤리는 선언이 아니라 운영이고, 이 운영의 끈질긴 반복 속에서만 겨우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