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는 뜻.
나는 종종 이런 생각에 빠진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가는 게 버겁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늘 고독할까.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이 사회가 이미 고장 난 걸까.
그 질문은 끝내 나를 사회의 얼굴로 향하게 만들었다.
한때 공부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다. 시험 점수와 성적을 떠나,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고 낯선 지식을 내 언어로 옮겨 적는 순간,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지는 듯한 환희가 있었다. 학문은 자아를 확장하는 길이었고, 그 확장은 성취감과 자기 확신을 불러왔다. 누군가 “공부 왜 하냐”라고 물으면 대답은 간단했다. “재미있으니까.” 단순한 동기가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때는 지식이 곧 나를 증명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 감각은 점점 흐려졌다.
이제 공부는 성취가 아니라, 취업을 위한 관문이자 생존의 절차가 되었다. 도서관 불빛 아래 앉은 청년들은 더 이상 호기심으로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 자격증 시험, 어학 점수, 인턴 경험, AI 활용 능력. 하나라도 빠지면 서류조차 통과할 수 없는 세상. 졸업장은 최소 조건일 뿐, 덕지덕지 붙은 증거들을 제출해야 겨우 입구에 설 수 있다. 그럼에도 합격은 보장되지 않는다.
나는 안다. 이 사회가 이미 균열을 품고 있음을.
2023년 고등교육기관 졸업자의 취업률은 70%를 겨우 넘었고, 청년 고용률은 15개월 연속 하락했다는 보도를 기억한다. 구조 자체가 청년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학문은 자유 탐구가 아닌 ‘시스템 통과 의식’으로 전락했고,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은 빈 껍데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자주 묻는다.
정말 내가 게으른 걸까?
아니면 이 사회가 청년의 시간을 갈아 넣는 괴물이 된 걸까?
스펙 경쟁은 끝이 없고, 정보 과잉은 방향을 잃게 한다. 온라인에는 ‘이 자격증이 필수다’, ‘AI가 대세다’, ‘이 길만이 답이다’라는 조언이 넘쳐난다. 그러나 다양해 보이는 길은 결국 같은 정답을 강요한다. 정해진 궤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실패자로 낙인찍히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가지려 하면 낙오자로 보인다.
결국 남는 건 자책이다.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내가 더 빨리 뛰지 못해서.”
그러나 분노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분노 뒤에는 늘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가 남았다.
작은 균열은 방치된 지 오래다. 깨진 유리창처럼, 사소한 무질서가 누적되어 전체 구조를 무너뜨렸다. 학문은 무기고로, 대학은 전쟁터의 대기실로 바뀌었고, 우리는 모두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허무는 또렷해졌다. 낮에는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흉내라도 낼 수 있었지만, 집에 돌아와 문을 닫는 순간 모든 흉내는 빠르게 무너졌다.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내가 붙잡은 건 안도감이 아니라 공허였다.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자살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OECD 1위라는 문장은 더 이상 충격이 아니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25명이 스스로 생을 끊는다. 그것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집단적 재앙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익숙해져 있었다. 숫자는 얼굴을 지웠고, 얼굴 없는 비극은 곧 망각 속에 묻혔다.
행복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UN 행복보고서에서 한국은 59위. 우리는 살아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듯, 어깨 위에 보이지 않는 짐을 지고 하루하루를 버틴다. 허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 전체의 공기처럼 떠돌고 있었다.
부모 세대는 늘 달랐다고 말했다.
“우리도 힘들었지만 열심히 살면 됐다.
우린 집도 사고, 가정도 꾸렸다. 너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은 평균 연봉의 15배를 넘었고, 집은 더 이상 노력의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숫자는 차갑지만, 그 안에는 세대의 좌절이 짙게 배어 있었다.
SNS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친구들은 웃고 떠드는 영상을 올리고, 릴스와 숏폼에는 행복한 삶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저 웃음은 진짜일까? 아니면 시선을 위한 연출일까? 원래 소확행은 빨래한 셔츠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소비와 인증으로 변질되었다. 행복조차 비교 가능한 콘텐츠가 되었다.
나는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느끼는 이 공허가 진짜 내 감정일까,
아니면 비교 끝에 남겨진 잔여물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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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하루 놓쳤을 뿐이었다. 단 하루. 그러나 그 하루는 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새벽에 잠들지 못해 뒤척이고, 아침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머리는 솜으로 채운 듯 둔탁했고, 작은 소리에도 흔들렸다.
처음엔 내 의지 부족이라 여겼다.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그러나 곧 알았다. 뇌의 화학적 균형이 무너진 순간, 이를 악물어도 몸은 제멋대로 무너졌다.
우리는 흔히 의지를 신격화한다. “정신만 강하면 뭐든 된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확신한다. 약은 단순한 보조물이 아니다. 내 삶을 이어주는 기반이고, 흐트러지는 하루와 하루를 연결하는 다리다. 약을 삼키는 순간은 “나는 오늘도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고백이었다.
약이 토양이라면, 의지는 그 위에 자라나는 작은 씨앗이다. 나는 그 씨앗을 지키기 위해 매일 같은 알약을 삼킨다.
사람들은 의지와 약을 대립시키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약이 있기에 의지가 유지된다. 그 사실을 인정하며,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언제쯤 약에 의지하는 삶을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라 불러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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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묘한 불안을 느낀다. 개인일 때는 평범해 보이던 이들이 집단 속에선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뀐다. 광기와 확신이 휘감고, 개인의 목소리는 사라진다.
사람들은 내면의 불안을 직시하지 않는다. 자기 결핍을 정치적 언어에 기대어 채운다. 자기 삶은 성찰하지 못한 채 “나는 옳다”는 구호만 반복한다. 나는 그 속에서 묘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 광경 속에 나 역시 사라질까 봐.
사회심리학은 이를 집단 극화라 부른다. 비슷한 의견만 듣다 보면 입장은 더 과격해진다. 동기적 추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원하는 결론만 붙잡는다. 알고리즘은 그 과정을 더 쉽게 만든다. 결국 메타인지, 즉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힘이 사라진다. 나는 그 사실에서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정치 과몰입은 열정이 아니다. 불안을 직시하지 못한 방어 기제다. 그러나 대화는 단절되고, 남는 건 증오뿐이다. 댓글창을 스크롤할수록 피로만 쌓인다. 욕설과 혐오는 불안을 드러내는 대신 폭력으로 덮는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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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깨닫는다.
나도 또 다른 확증편향 속에 있다.
비판을 쓰면서도, 내 글은 내 논리를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
나는 대롱으로만 하늘을 보는 또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넓은 시야를 가지기를. 스스로를 탓하기 전에, 틀 밖을 마주할 수 있기를. 그러나 그 바람조차 아이러니하다. 나조차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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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스스로를 미친 사람처럼 느낀다.
남들은 취업과 연애를 이야기하지만,
나는 존재와 허무, 죽음과 고독을 붙잡는다.
“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이 사회에서 제정신으로 버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니체는 고통을 힘으로 전환하는 자를 초인이라 불렀다. 나는 고통을 글로 직면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니체와 달리, 나는 기도의 언어 속에서 인간의 간절함을 보고, 공감을 인간의 가장 큰 힘이라 믿는다. 초연결 사회 속에서 질타를 견디며 나만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니체는 미치광이라 불렸지만, 나는 일부에게 공감을 받는다. 몇몇은 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린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완전히 잘못된 길을 걷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솔직하다.
이 사회가 이렇게 엉망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미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학문은 경쟁의 도구로 전락했고,
집값은 연봉의 15배를 넘었으며,
SNS의 행복은 허상이고,
집단은 이성을 잃어간다.
이 현실에서 제정신으로 버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미친 듯 기록하고, 미친 듯 살아남는다.
내 글은 언제든 반박될 수 있고, 내 사유는 부족하다.
그러나 나는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최선을 기록하려는 것이다.
철학은 완벽한 체계가 아니라, 삶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그리고 나는 고백한다.
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은,
나 하나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는 역설이다.
내가 쓰는 기록이 누군가에게 닿아
“정답은 없어도 이렇게 버틸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증거가 작은 불씨가 되어
누군가의 어둠 속에서 잠시라도 빛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미친 사람으로 남겠다.
그 미침조차, 아직 나를 완전히 빼앗지 못했다는 증거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