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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폐허생화 (廢墟生花)

폐허 속에서도 꽃이 피어남.

by 싱숭생숭

그 질문은 결국 나를 향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내가 무엇을 붙잡아 왔는지 묻다 보니, 남은 것은 관념이 아니라 체온이었다. 세상이 내게 씌운 말들—평균, 정상, 적응, 성취—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껍질이 벗겨진 자리에는 내가 오래 붙들고 있던 어긋남이 남았다. 나는 이상한가, 특별한가. 이 질문을 수십 번 굴려 보았지만, 답은 언제나 같은 쪽으로 기울었다. “세상에겐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 초연결의 시대에 다수의 시선은 빠르게 합의에 도달하고, 그 합의에서 벗어난 것은 손쉽게 낙인으로 호출된다. 농담처럼 붙는 단어들이 있다. 별나다, 과하다, 쓸데없이 진지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상함은 특별함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남들이 지름길이라 부르는 길의 가장자리에서, 내가 매일 주워 들고 닦아 온 것은 구겨진 표면과 보이지 않던 뒷면이었다. 그 자리에만 피는 꽃이 있다.


나는 이름 붙이는 일에 점점 서툴러졌다. ‘에세이스트’, ‘작가’, ‘철학하는 사람’ 같은 이름은 편리하지만, 이름이 붙는 순간 문장이 먼저 굳었다. 말의 온도와 결을 내 몸에서 꺼내기도 전에, 기대치가 먼저 내 목을 조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 글을 그저 증언이라 부르고 싶다. 남의 문장을 빌려 위로를 유통하지 않고, 내 결핍과 무력감, 고독과 분노를 끝까지 붙잡아 흙탕물처럼 저어보는 일. 맑아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바닥에서 오르내리는 찌꺼기까지 함께 본다는 결심. 많은 글이 포장지를 오른손으로 쥐고 왼손으로 선물인 척 건네는 것을 보았다. 불 꺼진 방에 촛불 하나 켜 놓고 사진을 찍듯, 어둠을 배경으로 삼을 뿐, 어둠 자체를 더듬지는 않았다. 나는 그 반대를 하고 싶었다. 촛불이 아니라 그을음과 냄새, 타다 남은 심지의 재를 기록하고 싶었다. 이름 없이 써도 괜찮다. 때로는 이름이 없는 편이 더 온전하다.


서툴다는 자각은 오래 나를 쫓아다녔다. 집에서도 나는 자주 말끝이 흐렸다. 말이 혀 끝에서 모래처럼 흩어지고, 가슴은 먼저 꺼졌다. 약을 삼키는 밤, 병명보다 선명했던 것은 복도 끝의 정적이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런 내가 정말 다른 사람의 무너짐을 들어줄 수 있을까. 대답은 쉽게 오지 않았다. 대신 몸이 먼저 기억했다. 완벽하게 단단한 사람 옆에서는 내 마음이 굳어갔고, 허술한 구석이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이상하게 말이 더 쉬워졌다. 나는 아직 미완이어서, 누군가의 미완을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정답을 내놓을 힘은 부족했지만, 침묵 옆에 오래 앉아 있을 체력은 조금 있었다. 상담이 정답을 주는 일이 아니라, 끝내 말해지지 않는 것을 함께 견디는 태도라는 것을, 나는 내 서툴음으로 배웠다. 미완의 구멍은 결핍이 아니라 바람이 드나드는 자리이기도 하다. 사방이 막혀 있으면 숨이 막히듯, 구멍 하나는 몸을 살게 한다. 나는 내 구멍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 구멍으로 드나드는 온도와 냄새를 기록하기로 했다.


감정과 울음의 문제는 더 직접적이었다. 나는 울음을 늦게 배웠다. 어릴 때는 억울하면 울었고, 아프면 울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눈물은 체면과 규범 사이에 묻혔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문장이 집과 학교의 천장에 붙어 있었고, 그 문장 아래에서 나는 자라났다. 눈물은 약함의 증거처럼 보였고, 약함은 곧 실패의 전조처럼 취급되었다. 그래서 나는 울음을 자주 미뤘다. 그리고 오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성숙이 아니라 억압이었다는 것을. 중년에 들어서 갑자기 눈물이 늘었다고 당황하는 어른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늘어난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이 뒤늦게 길을 찾아 흘러나온 것이라고. 언어를 붙이지 않으면 감정은 그림자로만 남는다. 그림자는 모양을 가졌지만, 스스로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내 그림자에 문장을 붙이기로 했다. “나는 지금 슬프다.” “나는 불안하다.” “나는 화가 난다.” 문장은 거짓말을 싫어했지만, 감정은 거짓말 위에서도 자랐다. 그러니 문장을 먼저 믿고 난 뒤 감정을 초대하는 연습을 했다. 울음은 약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탑승 신호 같았다. 떠밀리듯 하루를 닫던 밤, 눈물이 조금이라도 나와 주면, 몸은 그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여전히 부모 앞에서는 쉽지 않다. 오랜 가면은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 얼굴을 조금씩 복원하는 중이다. 가면 아래 피부가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오늘을 버틴다.


가족의 서사는 더 미세하게 나를 바꿨다. “기억이 안 난다”는 단 한 문장이, 하나의 시대가 선택한 방어기제라는 것을 뒤늦게 배웠다. 인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부터 속여야 산다. 부인과 투사는 현실은 밖으로 밀려나고, 잘못은 타인에게로 옮겨진다. 피해자라는 가면은 얼굴에 붙는 순간 접착제가 된다. 그 가면을 바라보는 동안 아이는 혼란 속에서 자란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한 몸에서 부딪힐 때, 아이는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돌린다. “내가 잘못해서다.” 신뢰는 바닥에서부터 금이 간다. 누군가는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는 어른이 되고, 누군가는 과하게 눈치를 보는 어른이 된다. 나 역시 한동안 두 사람을 번갈아 살았다.


나는 이제 경계선을 그린다. “그건 아버지의 선택이고, 내 잘못이 아니다.” 이 문장을 하루에 몇 번이고 마음속에서 소리 내어 읽는다. 경계는 미움의 벽이 아니라, 왜곡된 서사로부터 나를 분리하는 얇은 막이다. 그 막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체온이 양쪽으로 전해진다. 나는 한때 그 막을 칼처럼 세웠고, 한때는 그 막을 장막처럼 늘어뜨렸다. 이제는 막의 용도를 안다. 통과시키지 않을 것을 가려내고, 전달해야 할 것만 조심스레 통과시킨다. 이 일에 글이 도움을 주었다. 일기에라도 단 한 줄로 써 놓으면, 내 마음은 타인의 언어에서 한 발 물러났다. 내 언어로 재정의된 사건은, 더 이상 나를 삼키지 못했다. 가면을 벗겨내는 일은 종종 피를 본다. 그러나 피가 마르면 살이 붙는다. 나는 피 묻은 문장을 함부로 닦지 않기로 했다. 피의 자국이 남아야, 다음에 비슷한 일이 왔을 때 어디까지 물러서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고독은 늘 내 편은 아니었지만, 종종 가장 정확한 증인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을 때도 고독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고독은 가끔 내게 도구를 건넸다. 돋보기와 확대경, 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의 시계. 고독이 내게 가르친 것은, 의미가 즉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가라앉듯, 문장도, 감정도, 결론도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빨리 맑아지는 것을 의심하기로 했다. 상처 위에 곧장 흰 붕대를 감아 버리면, 그 아래에서 고름이 더 깊어진다. 차라리 공기를 통하게 두는 편이 낫다. 나의 서투름은 이렇게 해서 기술이 되었다. 급히 정리하지 않는 기술, 빠르게 납득하지 않는 기술, 끝까지 묻고 또 묻는 기술.


세상은 여전히 평균의 이름으로 나를 설득한다. 익숙한 성공의 문법, 검증된 루틴, ‘이 정도면 충분한’ 타협의 어휘. 그것들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내 몸에는 맞지 않는 옷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한 벌의 옷을 오래 입는다. 때로는 해진 소매를 그대로 두고, 그 해짐에서 배운다. 해진 자리로 바람이 드나들고, 그 바람에 피부가 튼다. 튼 자리는 겨울에 쓸모가 있다. 나는 내 결핍을 보온재로 쓰는 법을 배웠다. 완벽을 목표로 하지 않는 태도는 방종이 아니다. 오히려 더 치열한 관찰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일대기가 아니라, 무수한 장면의 결핍이었다. 이상하다는 낙인과, 이상함의 힘. 이름 붙이지 않는 글쓰기와, 이름을 갈망하는 시대. 서툴음과 기술, 억압과 직면, 가면과 피부, 경계와 연결. 서로 맞물리지 않는 조각들이 내 안에서 느리게 돌아가며, 때로는 부딪치고,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엇갈린다. 나는 더 이상 그 조각들 중 하나를 골라 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조각들이 서로를 갈아내며 만드는 파열음과 마찰열이 내 체온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어떤 날은 여전히 흔들린다. 흑백으로만 보이던 세계가 갑자기 회색으로 변하고, 회색이 다시 무채색의 안개로 번질 때,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것들을 꺼내 쥔다. 구겨진 메모 조각, 오래된 영수증 뒷면에 급히 적어 둔 문장, 밤에 꺼진 촛불의 굳은 심지. 별것 아닌 것들이 내 손바닥에서 온기를 만든다. 나는 그 온기로 다음 문장을 쓴다. 오늘의 문장은 어제의 나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일의 나에게 길을 가리키는 작은 촛불이 될 수는 있다. 촛불은 금방 꺼진다. 그래도 괜찮다. 그을음이 남는다. 나는 그을음으로도 길을 기억한다.


이쯤에서 ‘나’를 정의하라면,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미완으로 서 있는 사람, 가면을 벗기다 피부를 다치고도 다시 얼굴을 더듬는 사람, 평균의 문법에서 비켜나 흙탕물을 저어보는 사람, 울음을 늦게 배웠지만 울음의 문법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경계선을 그어가며 내 서사를 내 손으로 쓰는 사람. 나는 아직 문장 중간에 서 있다. 끝마침표를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나를 이름 붙이지 않은 채 부른다. 이름이 없다고 해서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이 없어서 더 정확해지는 결이 있다. 그 결을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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