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 전화위복 (轉禍爲福)

화를 바꿔 복으로 삼는다.

by 싱숭생숭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은 종류의 확신이 있다. 나는 한동안 그 확신을 모른 척했다. 익숙한 길의 마지막 칸만 채우면 되는 때였다. 필기는 붙었고, 일정도 잡았다. 주머니에는 수험표, 머릿속에는 텅 빈 답안지의 흰 여백. 그런데 날짜가 다가올수록 걸음이 뒤로만 갔다. ‘이걸 따서 나는 뭘 할까?’라는 물음이 가슴뼈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그 자격이 내 삶을 견디게 해줄 얼굴인지, 아니면 견딘 척하는 가면인지 알아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 포기가 아니라 정지였다. 억지로 높인 탑 위에 더는 벽돌을 얹지 않겠다고, 내 시간의 방향을 다시 정렬하겠다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한 날이었다.


멈춤은 공간을 낳는다. 그날 이후 나는 서류 대신 방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면 바로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주방 쪽에서 은은한 차 향이 밀려오고, 낮은 조도에 나무 탁자가 한 번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살짝 울리는 공간. 구석엔 검은 고양이가 몸을 세워 앉아 낯선 이를 너무 빠르지 않은 속도로 바라보는 장면.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 단단하지만 차갑지 않은 의자, 오래 묵은 책에서만 나는 종이 냄새, 대화가 진동처럼 번져도 벽에 부딪혀 튀지 않는 구조. 나는 그곳에 이름을 붙였고, 이름이 공간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고봄필. 높은 봄 햇살 아래 붓을 들듯, 마음을 고쳐 보고, 봄을 필사하는 자리.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 본 최초의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상담가는 마음이 건강해야 하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인다. 무너지지 않은 사람의 건강이 있고, 한 번 크게 무너졌다가 손에 들어오는 건강이 있다고. 나는 뒤의 쪽에 가깝다. 깊은 곳을 지나 본 사람만이 듣는 소리가 있다. 말을 그치려는 타이밍, 시선이 비스듬해지는 각도, 문장이 문장이기를 포기하고 한숨이 되는 순간. 그 소리는 책으로 배우지 못했다. 내 몸이 배운 것이다. 그래서 내담자는 종종 설명보다 표정을 먼저 믿는다. “이 사람은 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지식의 확신이 아니라 존재의 확신, 상담이 시작되는 힘은 대개 그쪽에서 나온다.


한동안 나는 나를 INFJ라고 불렀다. 감정에 민감하고, 의미와 깊이를 좇는 버릇이 그 네 글자와 잘 맞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라벨보다 더 큰 축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경성. 사소한 변화에 민감하게 흔들리는 신체와 마음의 기본 감도. 민감함은 피로를 부르고, 피로는 회피를 부른다. 동시에 그 민감함이 아니었으면 놓칠 미세한 신호들이 있다. 내담자의 손등에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경련, 끝말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한 음절, 똑같은 농담을 반복하는 초조의 리듬. 나는 그 신호들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민감함이 나를 몰아치지 않도록, 스스로의 안쪽에 제3의 자리를 만들었다. 대화의 한 귀퉁이에 ‘관찰자’ 자리를 남겨 두는 일. 감정의 파도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파도의 높이를 재는 일. 흔들리되 휩쓸리지 않는 연습. 이중 초점으로 세상을 보는 습관이, 내게는 방어가 아니라 도구가 되었다.


상담실은 권위와 안전 사이를 오가는 진자다. 학벌과 경력은 어떤 내담자에겐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같은 정보가 다른 내담자에겐 벽이 된다. “저 사람은 나와 너무 다르다”는 거리감이 입을 막아 버린다. 나는 그 벽을 낮추는 쪽으로 배운 사람이다. 내 이력은 화려하지 않다. 동시에 빈약하지도 않다. 그 ‘중간’이라는 사실이 나를 살렸다. 누구나 마음먹으면 밀고 들어올 수 있는 문턱, 두 칸짜리 계단, 설명 없이도 길이 보이는 구조. 사람들은 권위를 기억하기 전에 온도를 기억한다. 상담의 언어는 해석으로 시작해 해석으로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진단명 대신 호흡의 속도를 맞추는 것이, 질문 대신 침묵의 길이를 버티는 것이, 맞는 말보다 맞는 거리감을 찾는 것이 더 먼저다. 그건 학위보다 습관에 가깝다. 의자를 끌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드는 습관, 컵을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지 않는 습관, 첫마디를 빨리 꺼내지 않는 습관. 이런 사소함이 신뢰의 본체를 이룬다.


나는 글로 나를 정리해 왔다. 흔들림을 숨기는 대신 문장으로 고정해 두었고, 고정된 문장을 또 의심해 보았다. 글은 내게 브랜딩이 아니라 제어였다. 외부에 나를 증명하려는 일이 아니라, 내부의 과열을 식히는 작업. 우연히 블로그에 남긴 글이 어떤 이의 새벽을 버티게 했다며 도착한 메시지를 읽으며 배웠다. 명쾌함이 위로가 되는 순간도 있지만, 더 자주 위로가 되는 것은 ‘함께 버티는 문장’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받지 않아도 좋고, 완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한 줄 분량의 체온을 서로에게 나눠 갖는 일. 그것이면 충분한 밤이 있다.


나는 나의 상처를 실력으로 바꾸려는 유혹을 경계한다. 상처는 영광의 훈장이 아니다. 다만, 지나온 사람의 발걸음에는 특정한 탄력이 생긴다. “여기서 너무 빨리 뛰면 숨이 차요.” “이쯤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죠.” 내담자가 ‘영원히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낄 때, 나는 그 믿음 자체를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말의 속도를 낮춘다. ‘영원히’라는 단어가 입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러면 종종 그 자리에 ‘잠깐’이 들어온다. “잠깐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한 마디가 길을 바꾼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거창한 역전을 뜻하지 않아도 된다. 불행을 곧장 복으로 바꾸기보다, 불행이 지나간 자리의 토양을 한 줌씩 고쳐 놓는 일. 나는 그 현실적인 의미를 믿는다. 상처는 흙이 되고, 흙은 뿌리를 붙들 힘이 된다.


물론 자원으로 바뀌지 않은 상처는 칼날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나를 점검하는 루틴을 잃지 않으려 한다. 정기적인 슈퍼비전은 내 관점을 넓히고, 동료와의 사례 토의는 내 오만을 줄인다. 몸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단순한 생활은, 생각보다 더 많은 오차를 줄인다. 내가 흔들릴 때 내담자도 흔들린다. 균형은 거창하지 않다. 제때 자고, 제때 먹고, 제때 멈추는 일—이 기본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전문성의 울타리다. 상처를 자산으로 바꾸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동안 타인의 삶을 빌리지 않으려는 절제가 필요하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뉴스, 정치, 갈라치기, 짧은 영상과 긴 광고, 서로를 겨냥하는 말들의 회전. 나는 감정에만 기댈까 두렵고, 이성으로만 버틸까도 두렵다. 그래서 스스로를 밖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하루의 끝에 작은 저울을 꺼내 든다. 오늘 내가 건넨 말의 무게, 받아낸 침묵의 길이, 처리하지 못해 남겨 둔 감정의 찌꺼기. 저울이 한쪽으로 쏠리면 내일의 속도를 조절한다. 한 사람을 돕겠다는 말도, 모든 사람을 돕겠다는 착각도 조심한다. 내 손이 미칠 수 있는 지점에서만 손을 뻗는다. 그 짧은 거리 안에서라면, 나는 제법 단단하다.


다시 고봄필로 돌아온다. 이 방은 아직 종이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종이 위의 방이 현실의 방보다 먼저 효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구체적인 상상은 막연한 희망보다 오래간다. 문턱의 높이, 의자의 질감, 조명의 색온도, 첫 방문 기록지의 문항 구성, 안내 문장에 들어갈 동사 하나까지—상세한 상상은 나의 태도를 결정한다. 첫 문항은 병력보다 호흡으로 시작할 것이다. “요즘 숨은 어떠세요?” 두 번째는 수면, 세 번째는 안전. 그리고 마지막은 “오늘 이 방을 나설 때 무엇이 조금 덜 무거워졌으면 좋겠나요?”가 될 것이다. 상담의 목표를 큰 변화로 잡지 않으려 한다. 100에서 60이 되는 날보다, 60이 58이 되는 날을 믿는다. 변화는 종종 소수점에서 시작한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내가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결핍을 가진 내가 감히 타인의 무게를 다룰 수 있을까. 그러나 두려움이 사라진 뒤에야 시작되는 일만을 기다리다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두려움과 함께 문을 열고, 두려움과 함께 의자에 앉고, 두려움과 함께 첫 질문을 한다. 흔들리는 손으로도 따뜻한 차를 내릴 수 있다. 손이 떨리면 잔을 두 손으로 받치면 된다. 전문가란 떨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떨림을 처리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앞으로 나는 몇 개의 자격을 준비할 것이다. 배우고, 연습하고, 피드백을 받고, 내가 놓친 것을 다시 배우겠다. 학위는 끝까지 가져가되, 졸업장의 화살표가 아닌 내가 정한 방향으로 걷겠다. 큰 약속보다 작은 반복을 믿겠다. 매일 의자의 위치를 같은 각도로 맞추고, 매번 첫인사를 같은 속도로 꺼내고, 매번 작별 인사를 한 박자 늦게 끝내겠다. 같은 것을 꾸준히 하는 일은, 가장 느리지만 가장 멀리 간다.


나는 상담가가 될 것이다—라고 단정하지 않겠다. 다만 그렇게 살아볼 것이다. 누군가의 말이 길을 잃을 때 길가의 표지처럼 서 있고, 누군가의 침묵이 과하게 길어질 때 옆에서 호흡을 맞춰 주고, 누군가의 밤이 너무 두꺼울 때 새벽의 얇은 칼로 살짝 가장자리를 긁어 주는 사람. 높은 탑이 아니라 낮은 문, 비밀스러운 기술이 아니라 반복되는 배려, 정답이 아니라 함께 버티는 시간. 내 결핍은 그 시간을 버티게 하는 연료가 될 것이다. 나는 그 결핍을 숨기지 않고, 돌보며, 기록하며, 필요할 때는 잠시 내려놓는 법을 배울 것이다. 언젠가 고봄필의 문고리가 실제로 손에 닿는 날, 나는 문을 조금만 열어 둘 것이다. 바깥공기가 한 뼘 들어오도록. 혹시 어떤 사람에게 그 한 뼘의 공기가, 오늘을 넘기는 데 꼭 필요한 양일지 모르니까.

keyword
이전 19화18. 폐허생화 (廢墟生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