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드러나는 언행과 속으로 가지는 생각이 다름.
세상은 점점 더 가벼워진다. 짧은 영상 하나가 하루의 감정을 대신하고, 몇 초짜리 웃음이 긴 사유를 밀어낸다. ‘깊다’라는 말은 점점 더 어색한 칭찬이 되고, 차분히 말을 이어가려는 사람은 곧장 ‘분위기를 깬다’라는 낙인을 받는다. 어둡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놓는 순간, 그것은 진지함이 아니라 유난이라는 이름으로 조롱된다. 웃음과 농담이 둥둥 떠다니는 자리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사람의 자리는 차츰 밀려난다. 그 배제 속에서 남겨진 사람은 자신을 의심한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라는 질문은 “내가 잘못된 건 아닐까?”라는 결론으로 굳어지고, 끝내는 자기혐오의 늪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무게를 거부하는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이 가벼움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무거운 것을 견디지 못하는 집단적 회피의 방식이다.
그 회피의 한복판에서, 눈은 점점 더 완벽을 요구한다. 현실의 무대보다 관객석의 렌즈들이 더 강력한 무대 조명이 된다. 수십 개의 플래시가 한순간을 포착하고, 그 이미지들은 필터와 보정을 덧입으며 실제보다 더 완벽한 허상을 만든다. 그 허상이 공유되고 반복될수록,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현실보다 더 신뢰한다. 삶의 구체적 순간은 왜곡된 기록에 자리를 내주고, 불완전한 현실은 초라하게 퇴색한다. 나는 머리로는 그것이 꾸며낸 이미지임을 알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현실을 초라하게 느꼈다. 카메라가 찍어내는 타인의 완벽 속에서, 나의 결핍은 더욱 선명해졌다. “괜찮다”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그 안간힘조차 사진 앞에서는 무력했다.
몸은 그 허상 속에서 가장 빠르게 값이 매겨진다. 근육과 선명한 선은 사진 한 장으로 즉각 증명된다. 바디 프로필은 어느새 하나의 의식이 되어, 성인이 된 사회 초년생들이 한 번쯤 거쳐야 할 통과의례처럼 소비된다. 얼굴은 가리면서 몸은 드러내는 방식은 두려움과 욕망이 동시에 묻어난다. 빛나는 순간은 강렬하지만 오래 머물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사진뿐이고, 사진을 찍은 사람의 삶과 태도는 묻히기 쉽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서로를 견주듯 바프를 찍고, 그 이미지를 확인하며 안도하거나 절망한다. 나 역시 불편한 질문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운동을 하는가. 나도 결국 이 허상 속에서 나를 증명하려는 건 아닐까.”
몸은 사회가 가장 쉽게 점수를 매길 수 있는 표면이다. 근육질의 사진은 곧장 ‘좋아요’와 칭찬을 불러오고, 몸은 자기 관리와 성취의 상징으로 소비된다. 하지만 그 사진이 곧 건강과 회복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그것을 자기 극복의 기록으로 남기지만, 또 다른 이는 클릭과 시선을 얻기 위한 전시물로 내민다. 문제는 운동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몸을 바라보는 눈이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그 시선은 사람을 입체적인 존재로 보지 못하고, 표면의 선명한 근육에 모든 가치를 몰아넣는다.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운동을 하면서도, 가끔은 “나도 이 정도는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흔들렸다. 그러나 그 유혹은 언제나 허망하게 끝났다. 사진 한 장으로 남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끝내 붙잡는 이유는 숨을 고르고 다시 버티기 위해서다. 내 몸은 타인의 시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질 듯한 마음을 지탱하는 마지막 근육이기 때문이다.
결핍 역시 그렇다. 사람들은 결핍을 언젠가 채워질 빈칸처럼 여긴다. 돈으로, 성공으로, 스펙으로, 눈에 보이는 성취로. 그러나 결핍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억지로 메우려 들수록 그 빈자리는 더 선명해진다. 마치 얇은 천으로 구멍을 가릴수록 오히려 찢어져가는 것처럼, 감추려는 몸부림은 결핍의 깊이를 더 드러낸다. 세상은 결핍을 견디지 못한다.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공격한다.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약점이라 낙인찍히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완벽을 가장하면서 속으로는 각자의 결핍에 갇혀 있다. 그 불안이 질투로 번지고, 계급화된 질서 속에서 서로를 비교하며 겨우 안도한다. 완벽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구멍투성이인 인간들이, 서로의 구멍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날카롭게 타인을 찌른다. 나는 그 무리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세상을 통째로 바꾸겠다는 허망한 구호 대신, 결이 맞는 소수와 느슨하면서도 깊은 연대를 택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패배라 부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생존이라 부른다. 결핍을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보려는 태도, 그것이 내가 가진 최소한의 무기다.
결핍은 단순히 결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충만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없다. 모순과 결핍이 한데 엉켜 있어야 비로소 살아 있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결핍을 지워야 한다고 믿는다. 남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더 좋은 직장을, 더 날씬한 몸을 갖는 것으로 결핍을 증명 없이 상쇄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충만으로 치환된 결핍은 더 오래도록 다시 드러난다. 아무리 채워도 결국은 허무와 마주한다. 그 허무는 ‘왜 이렇게 애써도 공허한가’라는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나는 이제 그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애써 메우는 대신, 결핍 자체를 내 삶의 언어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차선의 힘, 숨 쉴 공간을 지키는 마지막 방법이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양면을 지닌다. 겉으로는 단단하고 주체적인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의존과 불안을 안고 산다. 독립을 외치는 입술 뒤에는 작은 인정과 소속감을 갈망하는 목소리가 숨어 있다. SNS는 이 양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한쪽에서는 ‘좋아요’ 숫자에 안도하며 위로를 얻고,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는 비교와 열등감에 무너진다. 웃음과 절망이 같은 무대에서 동시에 연출되는 장면.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구조다. 겉과 속의 괴리를 위선이라 단정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는 눈을 잃는다. 강함과 흔들림, 독립과 의존은 대립하는 항목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있는 짝패다. 한쪽을 지우려 할수록 다른 한쪽은 더 격렬하게 튀어나온다.
나는 이제 이 불일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틈에서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사람은 강하면서도 동시에 약하고, 스스로 설 수 있으면서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 이 모순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타인의 모순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공유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풍경이다.
세상은 앞으로도 표면을 숭배할 것이다. 얇디얇은 웃음이 사유를 대신하고, 잠깐의 농담이 오래된 침묵보다 더 큰 가치를 얻는다. 무거운 고백은 ‘예민하다’라는 말로 쉽게 무너지고, 결핍을 드러내는 순간 그 상처는 누군가의 조롱거리가 된다. 몸은 여전히 상품처럼 소비되고, 사진 한 장으로 환산될 수 있는 표면이 곧 인간의 자격처럼 취급된다. 양면성을 품은 인간은 위선이라 낙인찍히고, 모순을 드러내는 태도는 곧 약점으로 환원된다. 이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어긋남은 이제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나는 매끈하게 편집된 화면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로 했다. 반짝이는 착시에 매혹당하지 않고, 덧없는 과시에 끌려가지 않으며, 무게를 결핍이라 이름 붙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숨기려는 그 자리에 오히려 나를 앉히고, 조롱의 빌미가 되는 그 구멍을 굳이 드러낸다. 그것이 내가 끝내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단숨에 바꾸겠다는 말은 허망하다. 나는 거대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내 태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내 언어를 지우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억지웃음으로 버틸 필요도 없다. 때로는 자조적으로, 때로는 무력하게라도 솔직히 인정하며 버티는 것. 그 초라해 보이는 태도가 오히려 나를 살게 한다. 남들이 보기엔 휘청거림일지 몰라도, 그 휘청거림 속에서 나는 겨우 균형을 찾는다.
결국 내가 택한 방식은 단순하다. 웃음을 가장하지 않고, 결핍을 지워내지 않으며, 모순을 부정하지 않는 것. 이 불완전한 몸과 마음 그대로를 붙잡고, 그 상태로 하루를 견디는 것. 누군가에게는 미약한 저항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것이 살아남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