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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17. 춘풍화우 (春風化雨)

봄바람과 알맞게 내리는 비.

by 싱숭생숭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소멸을 전제로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쓴다. 언젠가 닥칠 끝을 상상하는 순간,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 오고 손끝은 차갑게 식는다. 본능은 현실로 도망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끝 대신 시작을 말한다. 첫 만남, 첫 계절, 첫 걸음, 첫 사랑. 모든 시작은 찬란하고 눈부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시작이란 언제나 끝의 그림자를 달고 온다는 것을. 계절이 열리는 순간, 그 안에는 이미 사라질 시간이 함께 들어 있었다. 웃음 뒤에는 이별의 기미가 숨어 있었고, 탄생 뒤에는 소멸의 낌새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 왔다. 어떻게 닫을 것인가, 어떤 형태로 멈출 것인가. 나에게 삶은 화려한 개막이 아니라, 천천히 내려앉는 막에 가까웠다.


죽음을 나는 단순한 종료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압축이고, 고정이었다. 길게 이어지는 피로와 공허가 내 삶을 잠식할 때, 죽음은 오히려 하나의 장면을 변질되지 않은 형태로 붙잡는 방식처럼 다가왔다. 왜곡되지 않는 한 컷, 영원히 닫힌 완결. 명분 있는 죽음은 시간이 흘러도 흔들리지 않는다. 삶은 언제든 희미해지고 기억은 쉽게 왜곡되지만, 죽음은 한순간에 고정된다. 그래서 나는 삶을 장기 투자에 비유했다. 끝없는 버팀과 인내, 그러나 회수율은 미약하다. 짧고 불안정한 강렬함이 스쳐가면, 그 뒤를 잇는 것은 언제나 길게 이어지는 피로와 공허였다. 성취의 기쁨은 오래 남지 않았고, 피로와 소모만이 내 안에 깊이 박혔다. 기억은 환희보다 소모를 오래 간직했고, 기쁨보다 피로가 더 선명했다. 그렇다면 이 투자를 끝까지 유지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망일 수 있는 내일이, 나에게는 피로의 연장일 뿐이었다. 그래서 때때로 죽음은 삶보다 더 고결하고 효율적인 완결로 보였다.


그러나 또 다른 순간, 나는 여전히 삶 쪽을 바라보았다. 버스 창가에 앉아 멍하니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볼 때였다. 창 밖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져나갔다. 헤드라이트가 잔물결처럼 흩어지며 창문에 어른거렸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었고, 그 낯선 얼굴 뒤로 다른 얼굴들이 흘러갔다. 축 처진 어깨, 지친 눈빛, 무표정한 옆모습. 그 낯선 얼굴들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저 사람에게도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작은 씨앗이 자라났다. 그 씨앗이 직업이 될지, 사명이 될지, 아니면 잠깐 스쳐가는 상상으로만 남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순간마다 나는 ‘살아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 않아도 된다. 단지 누군가의 세상 한 귀퉁이를 덜 시리게 만드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겨울을 버티게 하는 건 거대한 폭발이 아니라 작은 온기들의 축적이라는 것을, 나는 길 위에서, 카페 구석에서, 사람들의 뒷모습 속에서 배웠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이 두 목소리는 늘 충돌했다. 한쪽은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끝이 나를 삼키기 전에 내가 끝을 품고 사라지겠다는 결심. 삶은 소모일 뿐이며, 죽음은 완벽한 형태라는 귀결. 다른 한쪽은 따뜻했다. 누군가의 어깨를 덜 무겁게 만들고 싶다는 희망, 작은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길 바라는 바람. 이 두 목소리는 서로 다른 결로 울리며, 때로는 격렬하게 부딪혔다. 한쪽은 차가운 수학이고, 다른 한쪽은 미약한 봄기운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삶은 이 둘 중 하나로만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가능성에만 기대어 살아갈 수도 없고, 명분 있는 죽음만 좇으며 끝낼 수도 없다. 결국 나는 모순 속에서 살아왔다. 차갑게 계산하면서도 동시에 온기를 갈망하는 모순. 끝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시작을 기다리는 모순. 죽음을 압축이라 부르면서도, 삶의 작은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순.


그래서 나는 종종 바다의 장면을 떠올린다. 한때는 별빛이 돛을 이끌었고, 그림자가 나를 뒤따랐다. 그러나 그 시절은 이미 사라졌다. 돛은 바람을 잃었고, 파도와 나만 남았다.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지만, 나는 알았다. 다음 섬, 다음 항구, 다음 일출은 모두 비슷할 것이라는 것을. 새로움은 잠깐이고, 오래 남는 것은 피로와 공허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파도 대신 끝을 향해 걸어갔다. 내 마지막 장면이 변질되지 않도록, 왜곡될 틈이 없는 한 컷을 남기기 위해. 그러나 동시에 나는 경계했다. 죽음을 로맨스로 포장하지 않았다. 어떤 화려한 언어를 붙인다 해도 죽음은 결국 종료일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살았다는 증거? 웃기지 마라. 증거란 결국 남이 해석하는 것뿐이다. 해석을 남에게 맡길 바에는 차라리 내가 직접 마지막 페이지를 선택하겠다.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나는 또 다른 순간에는 파도에 젖은 손끝에서 작은 희망을 읽었다.


항해의 이미지는 늘 모순을 품는다. 끝없이 반복되는 파도는 무의미하고, 닿아도 닿아도 비슷한 섬은 지루하다. 그러나 동시에 바다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수평선 위로 피어오르는 빛, 아직 꺼지지 않은 별빛, 어쩌면 불어올지도 모르는 새로운 바람.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다시 붙잡는다. 발 아래 바닷물은 차갑게 현실을 끌어내리고, 위의 하늘은 꿈결처럼 손짓한다. 끝을 고집하는 나와, 시작을 기대하는 내가 같은 배 위에서 등을 돌리고 있다. 파도는 그 둘을 조롱하듯 잔잔하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숨을 상상한다. 언젠가 그 순간이 온다면, 나는 여전히 두 목소리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란다. 그 끝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이렇게 살다 가는 거라면, 괜찮다.” 그 말이 단순한 자기 위안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끝까지 직면한 자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기를 바란다. 끝을 스스로 선택하든, 삶을 조금 더 이어가든, 그 마지막 장면 속에서 나는 온기와 압축, 가능성과 명분, 모순과 고백을 함께 품은 채 사라질 것이다. 그 말이 내 마지막 숨에 스며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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