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과 성악설 (w/ 박어깨 작가님)
백지에 첫 자국을 남길 때 떨리는 마음을 생각한다. 시와 소설, 자기소개서, 일기, 처음 만든 캐릭터, 캔버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같은 ‘사람’은 형태를 띠고 있으나 공간의 느낌에 가깝다. 위아래는 물론 중력조차도 없는 공간에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의 태초는 선과 악으로부터 벗어나있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서서히 퍼지는 향기나 물감 혹은 온도처럼 연속적이다.
정해져있다는 사실은 잔인하다. ‘원래’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 언젠가, 어딘가의 결과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쉽게 무력해진다. 하지만 태어난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부모의 노력이 없다면 태아는 죽는다. 하지만 부모가 아무리 노력했더라도 태아는 종종 죽는다. 자신의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자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태아는 본능적으로 세상에 발을 딛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점에서 생명은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살기 위해 애씀이 꼭 의지와 지식을 동반할 필요는 없다. 무력하고 비생산적이고 때로는 자신을 가학하는 사람도 아이러니하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은 지나치게 삶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삶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선한 쪽에 가깝다. 하나의 삶은 하나의 세계이고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발을 빼면서도 세상을 종말 시키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삼고 그것에 대다수의 사람이 이의 없이 동의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우크라이나가 파괴되고 강원도 산간 일대에 산불이 나면 사람들은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힘쓰는 쪽으로 훨씬 많이 움직인다. 마스크 끼기, 다음 사람을 위해 자리를 치우기, 쓰러진 사람을 위해 구급차를 부르고 아이들의 질문에 잠시라도 말을 고르려고 노력하는 것은 선한 행동이자 삶에 가까운 행동이다. 자신의 다음, 다음, 다음, 그리고 더 셀 수도 없는 다음 세대를 위해 편의점에서 봉투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세계는 영생하지도 지속될 수도 없지만 우리는 지속되는 세계를 생각한다는 점에서도, 사람은 선한 쪽에 가깝다.
태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지만 가끔 전생 같은 그 때를 시뮬레이션 해 보는 건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과거에 태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삶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삶 중에 떠올리면 선한 쪽으로 기울게 된다. 내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 고됐던 만큼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사람들의 세계와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나중의 세계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걸 우리는 본능처럼 알고 있다.
하지만 삶을 지나치게 사랑하다보면 자신을 견딜 수 없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근로소득으로 삶이 해결되지 않고 능력주의가 신화가 되어 거대한 무기력에 잠긴 현재, 사람들은 삶을 위해 해왔던 노력들을 등지고 쉬운 길을 택한다. 선보다 악은 훨씬 쉬워서, 삶을 이어나가는 건 품이 드는 일이지만 삶을 해하는 선택은 단 몇 초 만에 결정한다. 쉽게 이어지는 생명은 없다. 우리는 자신의 세계가 종말 할 때까지 자신이 상처받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한다. 쉬운 선택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 건, 우리가 생명이라는 선에 가깝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생명, 선 쪽으로 기울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은 어렵지만 가치 있다는 믿음을 자주 떠올리려 한다.
- 박어깨 작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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