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과 성악설 (w/ 코요 작가님)
모든 존재의 근본은 선이라고 믿는다. 존재가 탄생하는 최초의 순간엔 ‘상태’만 있을 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인간의 특징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성질을 갖추고 있지 않다.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조건들은 우리의 몸이 이 세계의 논리를 흡수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우리의 일부로 자리를 잡는다.
따라서 인위가 개입하기 이전의 순간, 무언가 자연스럽게 탄생하는 과정에 대해서라면 악보단 선이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론 인간의 근본이 이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고, 원상태와 달라지는지 충분히 이야기하기엔 무리가 있다. 어쩌면 ‘본래’보다 집중해야 하는 것은 대상이 생겨난 이후 모양새를 갖추어 나가는 방식일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기 위해선 먼저 무엇을 선이라고 말하고 무엇을 악이라고 말할지에 대한 기준부터 정립해야 한다. ‘선’의 기준이 되는 ‘윤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이다. 그 방도에는 많은 항목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자신의 바깥에 실재하는 타자를 염려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감수성의 존재 여부는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하고 인간을 비롯한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흔히 성선설을 이야기할 때 함께 언급되는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의 기저에도 이러한 감수성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볼 때 사람이라면 모두 깜짝 놀라며 불쌍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 여기서 ‘마음’이란 인간의 학습된 이성이나 판단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는 온전히 사려가 깊지만은 않다. 이 세계에서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절대로 수평적일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인간이 아닌 것들의 존재를 곡해하고 파괴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존재를 해치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이자 동시에 한계다. 이는 매 순간 존재 자체가 모순인 삶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선함이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에 그치지 않고 삶의 과정에서 계속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달리할 수 있는 새로운 몸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를 비롯한 존재들을 껴안을 수 있는 몸으로의 변신을 꾀할 때 그것은 가능해진다. 우리는 공생의 가치를 지향하는 몸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의 중심이 되는 ‘근본’에 대한 논의에서 나아가 이 세계에서 인간이 가져야 하는 태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할 때 우린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 코요 작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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