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통령선거 (w/ 박어깨 작가님)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오는 3월 9일 치러질 예정인 가운데 여느 때보다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진보냐 보수냐를 깊게 고민하지 않고 말했던 사람들도 선뜻 어느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하기가 껄끄러워진 이유는 거대한 네거티브 전략이 폭풍처럼 대한민국을 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자신이 왜 당선되어야 하는지 사람들을 설득하기엔 각자가 가진 단점이 너무 극명해서였을지, 대선 후보들은 상대방이 왜 승자가 되어선 안 되는가에 집중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자신이 없다는 황당하고 저열한 저의가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2021년 4월 7일에 치러진 서울, 부산 시장의 보궐 선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서울, 부산 시장 보궐 선거는 성폭력을 저지른 범죄자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선거였다. 국민의힘 당원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것은 공교롭게도 진보라고 ‘여겨지는’ 민주당 소속의 시장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지만 정작 수신인은 발신인을 착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고의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그야말로 ‘토종’의 자연스러움에 가까웠다. 민주당은 20대 남성의 민심이 돌아선 것에 어쩔 줄 몰라 했고 국민의힘은 20대 남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기서 20대 여성은 20대 남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사지로 내몰 수 있는 졸 내지는 병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성으로서 삶이 늘 그러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의 아이러니이다. 5년 전만 해도 대통령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었는데 세상은 내 예상보다 더 빠르고 역겹게 달라지고 있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게 권리가 되고 전략으로 쓰이는 걸 막는 사람이 터무니없이 적어지고 있다. ‘씹선비’부터 ‘pc충’까지 내달렸던 도덕윤리 의식에 대한 반감이 도덕과 윤리보다 더 당연해지는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뭐든지 빨리, 빨리해서 국가 번호도 82인 한국에 혐오가 자리 잡는 속도를 북돋웠던 체제가 바로 능력주의다.
능력주의는 한국이 성장한 배경이자 2022년 한국에 혐오를 만연하게 만든 기반이다. 출발선이 어디에 있든 본인의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원하는 걸 성취할 수 있다는 부푼 꿈이 실현되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적어도 2022년에는 박살난 이론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서 능력주의는 가장 큰 축을 차지하고 있다. 성폭행을 저지르고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고도 ‘그래도 그 사람 능력은 있었다’는 평이 먼저 나올 만큼이나 능력주의의 역사성은 질기다.
능력주의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은 달갑지 않다. 혹자는 페미니즘이 오히려 여성들의 발목을 잡는다고 말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성별로 인한 구조적 차별은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끝난 것은 능력주의의 현실화다. 능력주의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기대, 지나간 청춘에 대한 기이한 환상을 갖고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능력주의자들의 환상을 들여다보면 <짱구는 못말려 : 어른 제국의 역습>에 나오는 미래에 대한 지나친 불신 속에서 과거의 영광을 영원히 되풀이 하고 싶은 악당보다도 알맹이가 없는 땡깡처럼 보인다. 다 쓰러져가는 선풍기로 매년 더워지는 여름을 이겨낼 거라고 하는 건 객기에 불과하다.
공정하다는 감각도, 정치에 대한 신뢰도 무너져 내린 현재 유일하게 작동하는 원리가 혐오라는 사실이 혐오스럽다. 약자를 혐오하고 구조의 불평등을 가뿐히 무시하고도 살아남은 몇몇 정치인들이 촉망받는 사실 역시 절망적이다. 지리멸렬 상태의 능력주의가 힘을 발휘하고 그게 최선이라고 믿고 지냈던 시간들에 진심으로, 이제는 정말 애도를 표하고 싶다. 비열함을 무기로 가져온 사람들을 그라운드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변질된 ‘참교육’의 의미를 되찾아야 하고 ‘혜지’라는 이름은 은어가 아닌 이름으로 남아야 한다. ‘ㅗㅜㅑ’가 영상 자막으로 아무렇지 않게 쓰일 때 여성들은 미간만 좁혀도 ‘페미냐?’는 사상 검증을 받는 시대에, 앞으로 이어질 5년에 부디 혐오로 인해 누군가가 희생되지 않기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란다.
- 박어깨 작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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