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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up 의사결정 모델

공무원과 연구용역, 위원회, 간담회

by freenobby

조직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검토를 통한 결정인 'Bottom up'과 위에서부터의 결정인 'Top down'입니다. 그런데 공무원 조직의 의사결정은 조금 기형적일 때가 있습니다. bottom up 도 아니고, top down도 아닌, 바로 'Top up' 모델로 이루어집니다.


위(top)에서 방향을 정합니다. 이 순간부터 이미 방향과 계획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시행하지는 않습니다. 위에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래(bottom)에서 그 방향대로 검토한 것처럼 만들어 다시 위로 올립니다. 그리고는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하며 시행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는 싶지만, 결정은 하기 싫어합니다.


물론, 윗선에서 큰 방향을 잡고 아래에서 이를 지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업무 방식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정한 방향이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그 방향이 너무 구체적인 경우 문제가 됩니다. 아래에서 검토할 때 발견된 부작용은 과소평가되고, 기대효과는 과대평가됩니다. 결국 합리적인 검토가 아니라 그럴듯한 말과 편향적인 근거만 만들어내는 결과를 내게 됩니다.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 중에 있는, 아래에서의 검토 단계가 바로 '연구용역', '위원회', '현장 간담회'입니다.




연구용역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정책을 바꿀 때, 먼저 나오는 말이 '연구용역이나 하나 하자'입니다. 처음 연구용역을 맡았을 때, 뭔가 거창하고 전문적인 느낌이 들어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곧 그저 형식적인 절차였음을 느꼈습니다. 이미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방향을 정한 상황에서, 그것을 뒷받침할 자료가 필요했던 것이고, 혹시라도 문제가 되었을 때 '컨설팅 업체에서 연구를 통해 제시한 내용이다'라고 하기 위해서 하는 절차였습니다.


연구용역에 배정되는 예산은 크지 않아 보통 영세한 컨설팅 업체와 일을 하게 됩니다. 업체선정 후 한 두 차례 미팅을 갖고 사업이나 정책에 대한 내용을 업체 담당자에게 이해를 시킵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들어가야 하고', '이러한 방향으로 적어야 한다' 내용도 거의 정해줍니다.


연구 진행상황을 체크하며, 중간 결과물을 받아봅니다. 처음 결과물을 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업과 정책에 대한 이해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고, 자체적인 검토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회의 때 말했던 내용을 그대로 넣고, 대학생 과제 마냥 본인들이 뽐낼만한 트렌디한 정책적 개념, 관련도 없는 해외 사례를 예쁜 PPT와 보고서에 녹여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걸 수 천만 원을 들여서 한다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업체의 행위가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정해진 결론을 예쁘게 포장해 주는 것이, 용역을 발주한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연구용역을 진행하면서 중간 보고회, 최종 보고회 등 보고회를 개최합니다. 윗사람들이 보고회에 참석하고 연구용역 결과를 발표합니다. 윗사람들은 내용을 들은 후, 한 마디씩 합니다. 원래 합의되었던 내용과 다른 말을 뜬금없이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방향은 모호하게 짬뽕이 됩니다.


연구용역이 마무리될 때쯤, 컨설팅 업체는 그제야 사업과 정책을 이해하게 되고, '이제 다 이해하셨구나' 싶은 순간 연구용역은 끝이 납니다. 연구용역의 결과물은 '미리 정해둔 결론'과 함께 '갑작스러운 윗사람들의 변덕'이 함께 비벼진 채로 예쁘게 포장되어 전달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무언가를 추진하게 됩니다.


위원회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내부 위원회를 관리했습니다. 본인이 왜 위원 되어야 하는지 모르는 분들께 연락해서 위원으로 위촉하고, 때가 되면 '꼭 회의에 참석해 달라' 간곡하게 요청드립니다. 회의 안건에 대해서 내용을 잘 모르는, 책임감 없는, 이름과 권위만 빌려온 위원들은 잠깐 설명을 듣고, 한 두 마디 한 다음, 내부적으로 결정한 사안에 대해 그대로 사인하고 의결을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다며 성대한 식사를 대접하고 사례비를 드립니다.


사무실 비품도 제대로 못 사는 형편에, 회의 한 번에 100~200만 원 넘게 나가는 것을 보며 현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부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책임을 분산하고, 위원 분들의 사회적 권위 뒤에 서있기 위한 가격은 비쌉니다.


정책이나 사업에 대해 실질적으로 토론하고 결론을 내는 위원회도 있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섭외하여 그분들의 의견을 모으고,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위원회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어느 정도 결론은 정해져 있습니다. 특정 방향을 주장하는 위원들을 미리 파악해서 위원회를 구성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위원들은 본인의 경험과 가치를 토대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결정은 '관'에서 하는 것인데, 어떤 방향을 원하는지?'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결정된 내용을 토대로 최종 결정을 합니다. 공무원은 '위원회에서 의결한 내용'이기 때문에 결정에 대한 책임이 가벼워집니다.


‘저희가 직접 구상한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 의결한 사항인데요?'라고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현장 간담회


'정책 결정을 할 때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라'라는 말은 소위 '소통'을 강조하고자 하는 윗사람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쉽고 편한 지시입니다. 그렇게 지시하기는 하지만, 결론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에 현장간담회 또한 결국엔 대부분 형식적인 일로 수렴됩니다.


현장간담회는 보통 고위공무원이 주최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윗사람이 현장에서 창피를 당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공무원들은 자유로운 토론을 표방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잘 짜인 각본을 통한 연극'을 추구합니다. 우리 기관과 의견의 궤도를 같이하는 사람들을 주로 섭외하고, 미리 질문거리를 받아 예상 질문과 답변 자료를 만들어 윗사람에게 보고합니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윗사람이 모든 사안을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에, 현장에서 기본적으로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우리 기관의 기본적인 입장은 무엇인지 알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껄끄러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미리 배제하여 필터링되지 않은 현장의 의견을 들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 윗사람이 무언가를 '모른다'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자유로운 토론을 막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저 의견을 듣기만이라도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결국,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절차적으로 '우리는 현장의 목소리를 담았다'라고 하며, 기존의 입장에서 변한 것 없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위에서 미리 정한 결정이 top up 모델을 통해 연구용역, 위원회, 현장간담회를 거치면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절차적 형식적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결정을 했어?'라는 비판에 3가지를 들이대면 아무도 탓할 수 없게 됩니다.


공무원으로 일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토대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윗선에서의 '정치적인 가치, 또는 눈치', '개인의 권위적인 변덕'이 실질적으로 결정합니다. 객관적이어야 할 연구와 합리적이어야 할 토론은, 그저 그 결정에 그럴듯한 이유와 정당성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권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사후적인 책임이라도 져야 하는데, 위와같은 행정의 마술로 인해 그 책임마저도 사라집니다.


공무원의 일로 한정해서 말을 했지만,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이야기하거나 뉴스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꼭 공무원 조직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전반에 퍼져있더군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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