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노비와 승진
승진은 공무원에게 주어지는 거의 유일한 인센티브입니다. 일반적으로 9급으로 입직 시 5~6급까지, 7급은 4~5급, 5급은 고위공무원단(1~2급)까지 승진하고 퇴직합니다. 30년 정도 근무하면서 약 3번 정도, 승진이라는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승진을 위해서는 당연히 '몇 년을 근무했는지'(경력),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근무평가)가 중요합니다. 경력은 객관적인 지표라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근무평가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합니다.
근무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자리에서 근무했는지'와 '누구 밑에서 일했는지'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수백 시간 초과근무를 했더라도, 좋은 '조직 단위(실, 국)'에서 근무하는 것을 이기지 못합니다. 또한, 근무평가나 승진을 결정할 때에 입김을 세게 불어넣을 수 있는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아울러, 같은 '조직 단위(실, 국)' 내에 나보다 경력이 많은 사람이 몇 명인지 눈치를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같은 조직 단위 내에서의 근무평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무리 고생한다 하더라도 말 그대로 '짬 순'으로 근무평가 순위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한 조직 단위 내에서 짬 순으로 근무평가 순위를 정하고, 그 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조직 단위의 중요도'와 '상사 입김의 강도' 순으로 전체 기관 내에서의 근무평가 순위를 정하게 됩니다. 기관 내외에서 인정받을 만한,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이런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결론적으로 '줄을 어떻게 서느냐'가 공무원의 승진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직급별로 승진하는 모습은 조금씩 다릅니다. 올라가면 갈수록, '경력'보다는 눈치 게임을 기반으로 하는 '근무평가'를 보는 경향이 있고, 더 올라가게 되면 '정치력'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9급에서 6급까지는 거의 90% 경력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도 입김을 불어넣으려는 시도가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짬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일을 못하고, 세평이 안 좋은 사람도 때가 되면 승진합니다.
1년 반 넘게 업무를 숙지하지 못하면서, 업무 시간에 할 일이 없다며 대놓고 휴대폰 게임을 하던 9급 주무관도, 때가 되니 바로 승진을 하더군요. 하도 일을 안 하고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일을 대신해 준 적이 종종 있었는데, 이 사람도 제때 승진한다고 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6급에서 5급으로의 승진은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경력 50%, 근무평가 50% 정도의 중요도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경력이 아무리 많아도 계속해서 승진에서 누락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5급 승진을 앞둔 6급 주무관님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승진을 위해서 어느 자리로 발령을 받아야 유리한지 눈치를 보고, 각 조직 내의 인사 담당자들과 컨택하며 자리를 알아봐야 합니다. 또한, 주변 동료, 상사, 후배들에게 평가받는 '다면평가 점수'도 승진에 포함되기 때문에, 점심, 저녁 식사자리도 허투루 쓰지 못합니다.
승진에서 누락되기라도 하면 그 피해는 본인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본인이 승진을 못하는 것도 억울한데, 다음에 승진해야 하는, 같은 사무실 내의 주무관들에게도 눈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승진을 못하면 그 조직 내의 차기 승진 대상자는 계속해서 낮은 순번을 받아야 합니다.
승진이 누락될 때마다, 전체 사무실 분위기는 싸해집니다. 같이 일했던 주무관님 중에 한 분은 승진을 해야 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1년 반 동안 승진이 안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승진 결과가 뜨면 조용히 컴퓨터를 끄고 조퇴를 하셨는데, 순간 사무실에 키보드 소리만 들리는 그 숨 막히고 차가운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단순히 능력이 부족해서 승진에 누락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하던 자리가 승진에 그다지 유리한 자리가 아니었고, 예전에 입김이 센 유력한 인사에게 잘 못 보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이 일하는 내내 안타까웠습니다.
5~6년 후의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그깟 승진이 뭐라고, 일은 몰아주지, 매일 야근하면서도 주변 눈치 보고, 다면평가 때문에 간이고 쓸개고 빼줘야 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간중간 병원을 다니던,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진 주무관님들을 보면서, 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자라났던 것 같습니다.
5급에서 4급으로의 승진은 이러한 경향이 더 심해집니다. 경력 30%, 근무평가 40%,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 30% 정도가 개입되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승진 대상자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7년이나 누락된 경우를 봤으니깐요. 물론, 보이지 않는 손은 항상 나쁘다고만 생각할 순 없었습니다. 4급이면 '과장' 직급에 해당하는데, 절대 과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어 보이는 분들이 계셨고, 그런 분들이 계속 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근무평가나 경력이 그렇게 높지 않으면서 능력도 뛰어나지 않은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빠르게 승진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때문에 4급으로의 승진 시기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물론, 결국 존버는 승리합니다. 7년 동안 누락되셨던 분도, 좋은 상사를 만나 인사권을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분과 만났다는 소문이 들렸고, 다음에 바로 승진을 하기도 했으니깐요. 하지만 7년 간의 그분의 고통을 쉽게 헤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6급에서 5급, 5급에서 4급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단계입니다. 6급에서 5급은 실무자에서 중간 관리자로의 진급이고, 5급에서 4급은 과장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의 갈림길이기 때문이죠.
3급 이상의 고위공무원단의 경우에는 사실상 경력은 무의미한 것 같았습니다. 3급까지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5급 고시 출신들은 순서대로 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고위공무원단의 경우에는 거의 정치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고위공무원단의 경우, 정권에 잘 보이고 충성하는 사람은 순식간에 승진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정권에 따라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합니다. 정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년퇴직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한직으로 나가려는 분들도 꽤 되셨습니다.
7급으로 입직한 후 3년 간은, 승진 시즌에 여러 가지 소문들을 들으면서 '그깟 승진이 뭐라고' 하며, '나는 절대 저렇게 승진에 목메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승진을 한다고 하여 월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것도 아니고, 굳이 직원들 간에 얼굴 붉히면서까지 승진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직접 놓이게 되면 또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냥 때가 되면 다 시켜주는 6급 승진을 앞두고도 동기들과의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고, 승진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저 역시도 '이번에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괜히 주변 눈치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뒤처질 수 있다는 그 가능성, '승진 누락자'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에 대한 두려움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오더군요.
공식적인 승진 발표 공지 전, 과장님이 제 옆으로 살짝 오셔서 조용히, '주무관님, 됐대'라고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는데, 승진에 대한 '기쁨'보다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훨씬 컸습니다.
승진 결과가 발표된 순간, 전화와 메신저, 메일로 여러 축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감사하다' 100번을 하던 와중에도,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 축하한다며 메신저와 메일을 보내왔는데, 그 속내가 뻔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에 축하를 하셨을 수도 있지만, 그분들은 모두 5급이나 4급 승진을 앞두신 분들이었고, 본인들의 다면평가와 세평을 위한 작업으로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그분들께 답장을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시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