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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정책 함유량 '1%'

공무원의 정책 포장 기술

by freenobby Mar 20. 2025

한 해에 각 기관에서 발표하는 대책, 계획, 방안 등으로 불리는 정책은 수백 가지가 넘을 것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만 거창한 정책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거창한 정책은 '00조 투입!', '0000억 규모 지원!' 등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발표됩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정책은, 과장하자면, 그 규모에 1%에 불과할 것입니다.


정책을 수립하고 관리하는 기관에서는, 먼저 그 정책에 핵심이 되는 사업 몇 가지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 규모를 뻥튀깁니다. 다른 기관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사업들 중에 손톱만큼이라도 본인들의 정책과 관련이 있는 사업들을 '색출'합니다. 그리고 그 사업에 대해 수 십 가지 자료를 요구합니다.


제가 직접 관리하고 있던 25가지 사업 중에 5개 사업은, 우리 기관 정책 외에, 다른 기관에서 관리하는 10개 이상의 정책 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 정책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정책과 관련된 자료 요구가 있었고, 똑같은 내용을 정책별로, 다른 양식에, 수 십 번 편집해서 자료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같이 파트너로 일하던 사무관님과 대화를 나눴던 게 생각납니다.


나: 대체 우리 사업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을까요?

사무관님: 일단 예산도 크고, 무엇보다 사업 이름이 예쁘잖아~ 내가 볼 땐 이름을 너무 예쁘게 지었어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었습니다. 사업 이름이 예뻐서라니..


'정책 발표'는 엑기스 사업 몇 방울 넣고, 뻥튀기한 규모와 함께, 예쁜 이름들로 잘 포장해서 발표하는 공무원의 '상품'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책의 과대 포장 때문에 의미 없는 자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기관에서 공문 하나 딸랑 보내며, 무슨 되지도 않는 제목을 가진 정책에 우리 사업을 포함하겠다며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별 연관성도 없었을뿐더러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게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그냥 자료요구를 무시하겠다며 보고를 드렸고, 아무런 회신도 하지 않았습니다. 몇 주 뒤, 그 공문을 보낸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상대 주무관: 저번에 보낸 공문 관련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생각이 났지만 모른 척했습니다.


나: 네? 그게 뭔가요?

상대 주무관: 저번에 보내드린 게 있는데 못 보신 것 같네요. 공문 한 번 찾아보시겠어요?

나: 이게 뭐였죠? 아무 연락도 없어서 그냥 잊은 것 같네요.

상대 주무관: 그게 저희가 새로 발표하는 정책 관련인데, 자료 좀 부탁드립니다.

나: 내용 보니깐 저희가 관리하는 사업이랑 이름 빼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요..?

상대 주무관: 그런가요..? 비슷한 사업으로 보여서 저희가 넣었거든요. 부탁 좀 드릴게요.

나: 넣기 전에 설명이라도 듣고 넣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보고는 드려 볼게요

상대 주무관: 저희가 몇 주 뒤에 발표를 해야 해서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ㅠㅠ


상대방 주무관의 사정이 딱해 보였지만, 저런 정책에 한번 들어가면 굉장히 귀찮아지기에 끝내 무시했습니다. 매년 정책 관련 시행계획, 매달, 매 분기 성과, 예결산 등을 작성해 달라며 자료 요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심지어 연말 연초에는 본인들이 상급기관인 양 우리 사업의 성과를 '평가'하겠다며 덤벼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것을 '협업'이라고 말하더군요. 이게 협업이라면 그냥 포카칩 봉지에 들어기는 질소를 만드는 '협업'일 것입니다.


 

수 백가지의 정책이 있지만, 그중에 그나마 국민들이 들어봤을 법한 이름을 가진 정책은 '저출산 정책', '청년 정책'일 것입니다. 이 정책들에도 어김없이 제가 관리하고 있던 사업들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출산 정책과 제가 관리하던 사업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었습니다. 정책 자료 상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업은 지역의 청년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가 있고, 이를 통해 지역 출산율에 기여한다.'


이런 연관성이라면, 우리나라의 모든 공공사업이 저출산 대책일 것입니다.


다행히도 국회에서, 저출산 정책과 연관성이 없는 사업들을 잡아내어 지적한 적이 있었습니다. 국회에서는, 저출산 정책에 사업을 넣어 놓으면 예산확보가 용이하기 때문에 넣어 놓았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억울했지만, 결국 국회의 도움으로 저출산 정책에서 제 사업은 빠질 수 있었습니다. 국회가 처음으로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청년정책'이라는 무지막지한 정책이 수립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언론에 '청년'이라는 키워드가 도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청년 정책을 위한 위원회까지 신설되었고, 청년정책 추진을 명목으로 각 기관당 2명씩이나 정원을 늘려주었습니다. 업무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죽어갈 정도가 되어야 1명을 줄까 말까 한 '정원'을 말이죠.


'또, 시작이구나' 싶었습니다.


예상대로 청년정책은 제 사업의 대부분을 집어삼키려 했습니다. 25개 중, 대부분이 들어간 것으로 기억합니다. 해당 사업 모두, 기본적으로 청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제 사업을 포함하겠다는 그들의 논리는, 사업 이름만 보고 '청년층이 대부분일 것이다'라는 추측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사업의 수혜자들을 나이대별로 구분해 보니 청년(만 34세 기준) 수혜자들의 비율은, 적게는 20%, 많게는은 35% 정도 되었습니다. 통계를 들이대며 '이게 무슨 청년 정책이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압박이 너무 거셌습니다. 그들은 사업별로 청년의 수혜비율까지 조사해 가면서, 그 사업 중에 청년층에 들어가는 예산이 얼마인지까지 계산해 달라며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위원회를 신설하고 정원까지 늘려가면서, 이미 하고 있던 사업에서 청년 예산이 얼마인지 추정하여 취합하고, 그를 기반으로 '청년을 지원하기 위해 00조를 투입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말이죠.


물론, 청년 정책에는 청년도약계좌라던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업이 많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곁가지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청년정책포털'이라는 사이트만 들어가도, 그냥 일반적인 사업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 청년만을 타깃으로 한 사업이 무엇이 있는지 찾기 힘듭니다.


실제로 의원면직 후에 혹시라도 도움을 받을 게 있을까 싶어서 찾아봤더니,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정책 포장을 위해 불필요하게 행정력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책을 구상하고 고도화하는 데에 힘을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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