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노비와 신규사업
공무원으로 만 1년을 근무하며 업무에 안정감을 찾고 있었습니다. 1년 정도 일을 해보니 대부분의 일이 조금씩 모양은 달랐지만, 본질은 거의 같았습니다.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프로세스에 따라 반복적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몸과 머리는 편했지만 조금은 공허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어쩌다 와버리게 된 잔잔한 호숫가에서 한 종류의 물고기만 잡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과장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ㅇ주무관 유튜브 한 번 해보지?'
'...... 제가요?'
그 당시 과장님은 밥을 먹을 때마다 지나가는 말로, '우리도 유튜브를 키워야 하는데...' 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계셨습니다. 담당하던 업무와 아무 관련이 없었기에 별생각 없이 흘려듣곤 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유튜브와 관련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었습니다.(다행이었던 것은 유튜버처럼 활동하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임용 후 1년 간 거의 반복적인 행정적인 업무만 했던 상황이라 도대체 뭐부터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를 그렇게 많이 보지 않던 때여서, 유튜브의 전반적인 생태계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일주일 간 자료 조사를 하면서 유튜브에 대해 찾아보았고, 과장님이 말씀하신 방향을 포함해서 말 그대로 '뇌피셜'로 신규사업 관련 보고서를 완성했습니다. 과장님의 큰 방향은, 유력한 유튜버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많은 콘텐츠를 제작하고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 방송과 업로드를 하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튜버를 관리하고 지원해 주는 기획사인 MCN(multi channel network) 회사라는 개념과 전통적인 방송국의 개념을 콜라보한 사업이었습니다.
보고서를 쓰면서도 '이게 맞나? 예산도 없는데..?' 하면서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제는 홍보를 위해서는 유튜브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국가기관에서 콘텐츠를 만들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컸습니다.
'실시간' 방송도 실현가능성이 낮고 효과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24시간을 채울 수 있는 콘텐츠를 어떻게 만드느냐'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루트를 통해서 시장조사를 해보니 50만 유튜브만 되어도 콘텐츠 1개 만드는데 2~3천만 원, 10만 유튜버는 500-1000만 원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뉴스도 아니고 누가 유튜브를 TV처럼 실시간으로 보고 있냐'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과장님께서 말한 보고서 마감일이 다가왔고, 결과물을 가져갔습니다. 이것저것 보완하라고 하셨고, 어느 정도 방향은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돈 문제였습니다. 애초에 배정받은 예산은 1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다른 일들처럼 흐지부지 될 것 같았고, 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걱정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보고서가 확정된 다음 날부터, 과장님께서는 유력한 유튜버들을 관리하는 대형 MCN 기획사 담당자 연락처를 주셨고, '일단 예산 생각하지 말고 여기랑 컨택해서 지금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라'라고 하셨습니다. 평온했던 공무원 생활에 큰 물결이 일었습니다.
며칠 뒤, MCN회사와 미팅을 했고, 역시나 시각차는 컸습니다. 상대 회사 쪽에서는 당연히 어느 정도의 대가를 원했고, 우리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뭔가를 찾아보자는 생각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싹수없는 말투의 상대 회사 팀장과, 고집이 있으셨던 과장님 사이에서 새우 역할을 하며 등만 터졌습니다. 결국, 서로 악감정만 남고 협업은 파토가 났습니다.
그리고, 사업방향은 오묘하게 흘러갔습니다.
'우리가 직접 유튜버 키우고 영상 만들면 돼!'
답이 더 없어졌습니다. 직접 유튜버를 키우고 영상을 만들고 실시간으로 송출한다니 말이죠.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더욱 커졌습니다.
물론 유튜버로 키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인력 풀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냥 일반인에 불과했습니다. 직접 실시간 송출을 한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송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직접 갖추는 게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습니다. 송출 솔루션을 개발하는 회사에 직접 찾아가서 설명을 들었는데, 사무실 여건, 인력, 예산 측면에서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과장님을 결국 설득했고, 비슷한 목적의 사업에서 예산 일부를 가져다 시범 용역사업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시범사업을 토대로 다음 연도 신규사업 예산을 확보할 계획이었습니다. 사업을 추진할 용역사로 소규모 콘텐츠 제작 업체를 선정했습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던 업체는 역시나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해는 갔습니다. 애초에 매우 도전적인 사업 모델이었고, 예산도 적고, 소규모 업체에서 유튜버를 만들고, 수십 수백 개의 영상을 만들고, 그것을 송출하는 시스템도 갖춰야 하니깐요.
그에 반해 과장님의 눈은 높았습니다. 첫 영상부터 '애들 납치해서 어디 감금해 놓고 찍은 것 같다'라며 혹평을 이어갔고, 계약 파기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몇 주에 걸쳐 입장차를 조율했고 어느 정도 사업이 얼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성과는 처참했습니다. 영상 퀄리티는 당연히 높을 수가 없었고, 영상을 업로드해도 많아 봐야 1,000회, 실시간 방송은 평균 20~30명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매일 들었지만, 담당자로서 어떻게든 사업을 살려야 했습니다. 처음 유튜브를 시작하는 유튜버에 빙의해서, 혼자서 실시간 채팅과 영상 댓글을 쓰고, 주변 직원들과 동기들에게 부탁해서 '제발 유튜브 띄어놓고 일해달라'라고 매일 홍보했고, 가용할 수 있는 SNS 채널을 통해 최대한 홍보했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실시간 방송은 40~50명 정도를 유지했습니다.
그래도 점점 사업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여러 이벤트도 만들고, 다른 기관과 협업도 하면서 퀄리티가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보고서에 써먹을만한 성과와 사진을 점점 쌓아갔고, 이를 통해 다음 연도 신규사업 예산으로 반영하려는 계획에도 희미하게 청신호가 켜졌습니다.
예산반영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업 모델 자체가 워낙 새롭고 도전적이라, 기재부나 국회에 사업을 설명하고 이해를 시키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어렵게 이해를 시킨 후에는, 공기관에서 '굳이'해야 하는 사업이냐는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솔직한 말로, 저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맞다'며 공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인지부조화의 상태로 대응했습니다.
기재부: 이거 꼭 해야 해요? 너무 나간 것 같은데요?
나: (그러니깐요 제발 막아주세요) 아닙니다... ~~ 해서 필요합니다...
기재부: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유튜브에서 홍보하는 건 지금 민간에서 다하는데...
나: (파이팅..!)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뇌를 빼고 '아닙니다.. 필요합니다..'를 반복했고, 신기하게도 기재부에서도 신규사업으로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국회에서도 역시 지적을 받았습니다. 여러 의원실에서 삭감 의견을 받았지만, 역시나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요법을 쓰며 버텼습니다. 사업이 반영이 되더라도 많이 삭감되고 반영될 줄 알았는데, 사업은 예상보다 큰 규모로 반영되었습니다.
'이게 왜 진짜 되냐...'라는 생각이 들었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인사발령 이야기가 나왔고, 본격적인 사업 추진의 키는 다른 분께 넘겨드려야 했습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사업을 떠넘기고 가게 되다니 후임자 분께 너무 죄송했습니다. 최대한 떠나기 전에 차년도 사업 계획을 확정 지었고, 용역발주를 위한 서류도 거의 만들어 놓고 떠났습니다.
다른 과를 간 이후로도 종종 유튜브가 잘 되고 있나 확인하곤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보다 잘 운영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떠나서, 이런 사업이 필요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아직도 제 생각엔 '굳이 해야 했던 사업인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단순 반복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가면서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다'라는 생각은 순간순간 일에 대한 재미를 주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과 판단대로 일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내가 무언가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라고 느낄 수 있는, 일에 대한 보람까지 느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