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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관님, 꿈은 뭐였어요?

공노비와 창업

by freenobby Mar 13. 2025

2018~2019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벤처 붐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도 발 빠르게 창업 지원을 확대했었고, 그즈음 새로운 과로 발령을 받아 창업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일반적인 행정업무가 주였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새로웠습니다. Series A, B, C 가 뭔지, 모태펀드는 뭐고, 전환사채가 무엇인지, 재무제표 보는 법 등등 새로운 것들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창업지원 사업은 빠르게 확장되었습니다. 예산 증액에 인색한 기재부가 역으로 오히려, '돈을 줄 테니 창업 지원 사업을 만들어 오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2년 반 동안 일하면서 관리하고 있던 창업 지원 예산은 거의 5배로 늘었습니다. 소규모 사회적 기업부터 초기 스타트업, 중견 벤처까지 다양한 기업을 지원하는 사업이 만들어졌습니다. 발령 초기에 비해 맡은 업무는 거의 2배 가까이 증가했었지만, 창업 지원 업무를 담당하면서 창업자 분들과 이야기할 기회도 있었고, 그 분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재미있었습니다.




요즘, 예전에 창업을 지원했었던 기업들이 인터넷 광고나 옥외광고에서 한 번씩 보이곤 합니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신기했습니다. 저 분은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갔구나 싶으면서도,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한 번은,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한 특별융자 지원 사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벤처 기업에게 낮은 이자로 융자를 해주는 사업입니다. 기업으로부터 서류를 받고 결격사유가 없으면, 은행에 전달해서 신용과 담보에 따라 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매칭해 주는 구조였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기업에서 신청했었고, 보내 온 재무제표와 서류들를 둘러보았습니다. 정상적으로 운영될 만큼 수익이 나는 기업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 기업은 자본잠식인 상태에서 3년 동안 계속 자기 자본을 투자해 온 경우가 있었고, 어떤 기업은 융자를 위해서 본인이 타는 400만 원짜리 중고차까지 담보로 잡겠다고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대표님은 그냥 우편으로 서류를 보내면 되는데, 굳이 인사를 하시겠다며 사무실까지 와서 서류를 제출하셨습니다. 우리 쪽에서 융자 규모나 실행 여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은행에서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려도, 괜찮다면서 오시더군요. '꼭 좀 잘 부탁드린다'라고 하시는데, 창업하신 분들이 얼마나 절박한 지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번씩, 현장에서 창업한 대표님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인이 해야 할 것들을 스스로 찾아서, 꿈을 가지고 헤쳐나가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습니다.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공무원 사회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확신에 찬 모습은 겉으로만 드러난 것일 겁니다. 대표님들 대상으로 창업을 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문을 한 적이 있는데, TOP3 안에 '대표로서의 멘탈 관리'가 있었습니다. 창업 지원 사업을 관리하는 공기업 직원분들은 대표님들과 자주 연락을 하곤 했습니다. 직원분들이 말하시길, '대다수의 대표님들이 심적으로 상당히 힘들어 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표님들의 멘탈 관리를 위한 상담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도 있었습니다.


공무원이나 직장인은 먹고 살기 위해, 단지 갖추어진 시스템에 본인의 시간만을 투자하는 것이라면, 창업은 본인의 시간과 함께 현재의 자본과 미래의 자본(부채)까지, 본인의 모든 것을 영끌해서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분들뿐만 아니라 도전을 하시는 분들 모두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창업 지원 사업 관련 행사가 있어서 지방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행사는 대부분 함께 일하는 공기업 직원분들이 실무적으로 준비했었고, 저는 행사 감독과 관련 회의에 참여만 하면 되는 일정이었습니다. 이런 출장은 굳이 안 가도 되기에, 보통은 일이 바빠서 못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과장님은 '담당자가 가야지 누가 가냐'며 바쁜 일 있어도 갔다오라고 하셨습니다.


출장 내내, 공기업에서 나오신 40~50대 차장, 팀장급이, 주무관이라는 직급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나'를 모셔주시니 몸 둘 바를 몰랐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얻어 먹고, 탑급 연예인과 인사하고 사인을 받을 기회도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갇혀 기계적이고 무의미한 일을 하면서, 월급도 적은 '나'의 상황에 대해서 만족스럽지는 않은, 내가 꿈꿔온 삶은 아니었지만, '주무관이라는 직급이 의미는 있구나'라며 조금은 나의 상황에 대해서 긍정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날, 우연찮게도 동갑내기인 대표님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는 몇 시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소위 로컬크리에이터 같은 분이셨습니다. 본인이 몇 년 동안 한 일에 대해서 신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역 내에서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하거나, 지역에 이벤트를 기획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무 도움도 없이 꿈을 위해 스스로 그런 삶을 개척했다는 게 정말 대단해 보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자리를 확실히 잡은 것은 아니고 미래도 불안정하지만, 앞으로는 무엇을 하겠다는 확고한 청사진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님은 몇 분 동안 본인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주무관님은 일하시는 거 재미있으세요?'


순간 비수가 날아와 꽂힌달까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그나마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업무를 하고는 있었지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뜸들이며 말했습니다


'뭐... 그냥 하는 거죠 ㅎㅎ 공무원 일이 뭐가 있겠어요...'


얼굴에 미소가 조금 사라지시더니 다시 물어보셨습니다.


'주무관님, 꿈은 뭐였어요?'


거의 5년 만에 듣는,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질문에 머리가 새 하얘졌습니다.


'음... 막상 물어보니 기억이 안 나네요. 뭐였더라...'


말을 얼버무리는 순간, 밖에서 저를 찾는 소리가 들렸고, 도망치듯 황급히 그 자리를 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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