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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노비와 채용

의원면직의 계기

by freenobby

요즘 선관위 채용 비리 문제로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채용 업무를 해 본 입장에서 실무자들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인사 관련 감사를 받게 되면 무엇보다 가장 철저하게 점검을 받는 것이 바로 채용이기 때문입니다. 채용 업무만큼은 어떠한 문제나 시비도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부분에서 민감하게 계획하고 실행해야 했습니다. 저에게도 공무원 채용 업무는 가장 힘들었던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공무원 6년 차에, 특수한 분야의 작은 기관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시에,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편한 업무를 맡아서 몇 개월 간 행복하게 일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30분 걸리는 출퇴근이 하루 일과 중에 가장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내년에 공무원 5명을 직접 채용해야 할 것 같다'라는 말이 사무실에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인사와 채용을 담당하던 주무관님은 내년에 큰 일이라며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분이라 매번 같이 산책을 하면서 고민을 들어주었고, '바쁘시면 많이 도와드리겠다'라고 위로를 해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분이 떠나시게 되면 내가 할 것 같은데'라는 불안이 스치기도 했습니다.


안 좋은 예감은 반드시 현실이 된다고 했던가요. 그 주무관님은 몇 달 뒤 인사발령으로 기관을 떠나게 되셨고, '설마 내가 하겠어?'라고 생각했던 그 채용 업무를 운명처럼 맡게 되었습니다.




사실 모든 채용이 다 힘든 것은 아닙니다. 서류와 면접만으로 채용하는 경우에는 손이 많이 가기는 하지만 그렇게 유난스럽게 힘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서류와 면접에 더해서, 필기시험이 있는 경우 채용업무는 10배이상으로 힘들어지게 됩니다. 시험 문제 제작에서부터 보안유지, 시험장소 대관, 시험감독 모집과 교육, 블라인드 채점 등등 직접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채용 절차가 시작되기 두 달 전부터 과장님과 사무관님은 매일 같이 저를 불러서 채용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경우도 있었고,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하고, 누구한테 연락해서 꼭 물어보면서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뭘 놓쳐서 징계를 먹었고...' 똑같은 말을 3번 이상 들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채용과 관련된 법과 규정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채용 관련 규정은 정말 복잡하고 더럽습니다. 단언컨대, 챗GPT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정한 채용을 위해서, 모든 가능성에 대비한 것 같은 세부적인 규정과, 우대조건, 다양한 경력 산정 방법, 시험문제 제작 단가, 시험과목, 일정 등등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 것들 중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징계를 받게 됩니다.


기관 차원에서도 3년 만에 직접 채용을 하게 된 것이라, 기존에 있던 자료를 바로 갖다가 쓸 수도 없어서 꼬박 1주일은 규정을 익히고, 여러 군데 전화로 물어보면서 채용에 대한 감을 잡아 나갔습니다. 이곳저곳 물어볼 때마다 모두들 '하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냐... 어떻게 업무 맡자마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 주시라...'라며 안타까움과 위로를 표했습니다.




채용 관련해서 계획을 세우고 기관장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기관장님은 괜히 채용 관련해서 의심을 사기 싫었는지, 본인한테는 중간중간 결과만 전달해 달라며 그냥 믿을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조금이라도 채용 문제와 엮이게 되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채용 업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관문은 '지원 서류를 어떻게 받을 것인가'였습니다. 몇 년에 한 번 채용을 하는데, 자체적인 온라인 시스템이 있을 리 만무하고, 우편으로 받자니 서류가 최소 300건은 넘을 텐데 혼자서 손으로 정리하고 관리할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인사처가 관리하는 시스템을 통해 협조를 받는 방법이 있었지만, 주변에 물어보니 그 정도 규모는 협조를 안 해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도저히 손으로 할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인사처 담당자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제발 부탁드린다'며 읍소하였고, 결국 지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편하게 지원 서류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업무는 '필기시험 준비'부터였습니다. 필기시험 준비는 말 그대로 맨바닥에 헤딩입니다. 시험장소 대관, 문제 출제를 위한 합숙장소 대관, 가위와 풀부터 노트북, 프린터 등 물품 준비, 출제위원 교수 섭외까지 하나하나 직접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저 업체와 계약하여 지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시험장소는 여러 학교에 접촉하면서 적합한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출산율이 많이 줄어서 그런지 300여 명이 시험을 볼 수 있는 학교가 별로 없었습니다. 게다가 주말 토익이나 여러 시험들이 많아서 생각보다 여의치 않았습니다. 극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대관이 취소가 된 학교가 나와서 대관할 수 있었습니다.


시험 문제 출제 장소는 호텔을 잡아야 했습니다. 문제를 출제하고, 문제를 출제한 교수들을 2박 3일간 채점이 끝날 때까지 외부와 단절시켜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숙박비였습니다. 생각보다 호텔 숙박비가 최근 몇 년 새에 너무 많이 올라버려서 잡혀있는 예산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과 예산을 읍소하며 끌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출제위원 섭외입니다. 최대한, 지원자와의 학연과 지연이 없으면서도, 2박 3일간 외부와 단절된 채로 있을 수 있고, 출제위원으로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교수를 찾아야 했습니다. 애초에 특수한 분야의 공무원을 뽑는 것이어서 후보가 많지 않았고, 심지어 방학에 휴가철이라 외국에 계신 분이 많았습니다.


일정이 괜찮으신 분들은 뭔가 전화를 하면 약간 싸한 기분이 들었고, 이래저래 다시 찾아보면 조금 문제가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결국 교수님들의 '일정'과 '저명함' 사이에서 약간의 타협을 거쳐 8명을 섭외했습니다.


물품 준비도 일이었습니다.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서 물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쿠팡사이트에서 며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 호텔에 노트북 여러 대와 프린터를 설치해야 했는데 이걸 조율하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출제위원들이 2박 3일간 호텔에 갇혀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호텔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공무원 예산으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었고, 최대한 대접받는 느낌이 들면서도 저렴한 도시락과 간식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거 찾는 데에만 하루를 꼬박 썼던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사람 관리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위와 같은 것들은 혼자 준비를 할 수 있었지만, 결국 현장에서 시험 감독관, 출제 감독관, 기타 지원인력 등등 약 30~40명의 인원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들 머릿속에 시험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각인을 시켜 놓아야 했고,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 줘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계획하고 설명하는 게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몇 차례 모아서 교육하고 시간대별로 해야 할 일을 분단위로 구체적으로 정리해주어야 했습니다.


이외에도 시험감독관 교육, 안내자료 제작, 답안지 제작, 시험 방송 멘트 녹음 파일 제작, 현장 현수막과 시험장에 부착할 안내 종이 등등 손이 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혼자 준비하느라 끝에 끝까지 준비가 덜 된 것이 있는지 체크해야 했습니다. 현장에 3~4번씩 방문하면서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체크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습니다.


필기시험 일정은 총 3일입니다. 1일 차 문제 출제, 2일 차 시험, 2~3일 차 채점 순으로 이어졌습니다. 1일 차부터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어 만족스러웠습니다. 직원 분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도와주셨고, 사무관님이나 과장님도 뭐라 건드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할 게 없어 보이셔서 사무관님과 과장님께 이것저것 일거리를 드렸습니다.


큰 문제없이 채점까지 마무리되었고, 필기시험 합격자를 추려낸 순간, 몇 달간의 모든 긴장과 피곤이 다 풀렸던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같은 자리에서 채용 업무를 하셨던 분이 필기시험 준비하다가 과로로 큰 사고가 날 뻔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 말이 십분 이해가 되었습니다.




필기시험 이후에는 서류전형과 면접전형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단계에서도 평가위원을 섭외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필기시험 출제자들은 다시 섭외할 수 없었기에 풀이 매우 적었습니다. 게다가 필기 합격자들과 출신 학교나 직장이 겹치면 안 되는데, 필기 합격자들이 대부분 메이저한 학교나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명망 있으신 분들은 대부분 섭외할 수 없었습니다. 꼬박 일주일 동안 지인 찬스를 써가면서 꾸역꾸역 섭외하여 면접전형까지 마무리했습니다.


공무원 채용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채용점검위원회라는 것을 열어야 합니다. 타 기관 인사 담당자들이 채용이 적절하게 진행되었는지 점검하는 절차입니다. 몇 달 동안 만들었던 공문 등 채용 관련 서류를 모두 모아서 점검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합니다. 다 합쳐보니 약 300p가 넘었던 것 같습니다. 이걸 혼자 다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고, 행정 절차 몇 가지만 거친 후 바로 합격자 분들을 임용했습니다. 채용을 준비했던 기간까지 합치면 거의 6개월 정도 소요되었던 것 같습니다. 6개월 간의 부담이 완전히 사라지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더군요. 임용되신 분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 뽑히셔서, 여기저기서 '잘 뽑았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주말까지 밤을 새워 가며 일해서 얻은 게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채용 업무를 맡기 바로 전, 일 없이 빈둥빈둥했던 몇 달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성과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고, 승진 점수가 높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개고생을 했다고 하여도, 작은 기관에서 했던 일이었기에 아무런 성과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떠안은 일에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인 것뿐이었습니다.


채용 업무가 거의 끝날 무렵, 저는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몇 달 뒤에 결국 의원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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