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감사 대응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권위에 찌든 집단이 바로 국회입니다. 누구보다 "혁신과 소통"을 외치지만 그 어떤 곳보다 비효율적, 권위적, 형식적입니다.
공무원 5년 차에 접어들어서, 한 소규모 기관의 국회 총괄업무를 맡았습니다. 일상적으로는 국회 쪽과 소통하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자료를 제출하고, 1년에 한 번 국정감사를 대응하는 업무입니다.
인수인계를 받자마자 항상 궁금했었던, '1년에 몇 건의 요구자료를 처리하는 것일까?'에 대해서 찾아봤습니다. 생각보다 충격적인 숫자여서 놀랐습니다. 부처 전체에서 총괄하여 처리하는 요구자료는 1년에 약 3,600여 건였고, 제가 직접 담당하는 기관에 별도로 요구된 자료는 약 150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요구자료는 10월에 있는 국정감사와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에 8월 중순에서 10월 초까지의 기간 내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국정감사 시즌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자료가 바로 '공통요구자료'라는 자료입니다. '기관 내 징계 건, 고소고발 건, 기관 현원' 등 기관 내의 일반적인 정보에 대해서 요구하는 기본적인 자료입니다. 공통요구자료 1건 안에는 적으면 20건, 많으면 100건이 넘어가는 질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공통요구자료는 의원실마다 별도로 요청합니다. 요청하는 내용은 거의 다 비슷한데, 답변의 양식과 요구하는 범위와 내용이 미세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똑같은 내용에 대해서, 요청하는 의원실의 수만큼 반복해서 다른 형태로 가공하여 제출해야 합니다. 제 경우에는 17개 정도의 의원실이 있었네요.
일반적인 내용에 대해 비슷한 자료를 요구할 거면, 위원회에서 질의내용과 양식을 통일한 후에 일괄적으로 요구하면 서로 편할 텐데 왜 이렇게 서로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언론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아니면 국정감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는 자료가 99.9%인데 말입니다.
'국회의원 하나하나가 별개의 헌법기관이야'이라는 권위에 매몰되어 있거나, '원래 이렇게 하는 것이니까'라는 관성에 젖어있거나, '우리는 이렇게 너희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어!'라는 사디스트적인 생각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단순 반복적인 일을 해주는 AI 툴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데, 수십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Hwp파일에 '질의주신 내용은 해당사항 없습니다, 질의주신 내용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라고 하나하나 직접 경어체로 쓰면서 야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국회요구자료를 완성하면 국회자료제출 시스템을 통해서 온라인으로 제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끔 이상한 비서관이나 보좌관에게 잘 못 걸리면 직접 찾아가서 USB로 자료를 제출해야 합니다.
어떤 한 의원실에서 보내온 요구자료 내용을 보았습니다.
'답변자료는 직접 방문해서 USB로 제출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시 미제출한 것으로 보고 징계를 요구하겠다'
그렇게 중요한 답변자료도 아니고, 설명이 필요한 내용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럴까 싶었습니다. 그것도 협박조로 말이죠. 주변에 이런 경우가 있었는지 물어보니, '국회가 점점 심해진다'라고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바쁜 와중에 굳이 자료를 제출하러 국회로 출장을 갔습니다. 의원실에 방문해서 자료를 요구했던 비서관에게 갔더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비열한 웃음을 지으면서 악수를 청하더군요.
'앞으로 국정감사 할 텐데 국회 담당자 얼굴이라도 보려고 불렀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기까지 불렀으면 차 한잔이라도 청하려고 이러나 싶었지만 악수하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만 듣고 의원실을 나왔습니다. 기강을 잡으려고 이러는 건가 구시렁대면서 의원실을 나왔습니다.
의원실에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려던 중, 진귀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히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급하게 뛰어 와서 엘리베이터를 잡더군요.
그러더니 잠시 뒤에 국회의원 배지를 단 3명이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보좌관으로 보이는 3명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깍듯하게 의원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를 했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습니다.
문이 닫히자마자, 한 여자 국회의원이 혀를 차면서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빈정댔습니다.
'어휴 요즘 보좌관들은 빠릿빠릿하지 못해. 아주 답답해 죽겠어. 해병대 캠프라도 보내야 돼'
그러더니 갑자기 뒤통수가 뜨끔했는지, 뒤에 있던 저를 돌아보며 가늘고 상냥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국회의원: 혹시 기자 분이신가요? ^^
나: 아 아닙니다..
국회의원: 아...^^
직접 와서 제출하지 않으면 징계 요구하겠다는 비서관의 꼰대짓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잘 알 것 같았습니다.
국정감사 며칠 전부터는 주말이 없습니다. 국정감사 전, 주말에 국회에 가서 국정감사 수감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먼저, USB를 들고 가서 국정감사장에 있는 의원들의 노트북에 '국회의결 요구자료'라는 자료 하나를 넣어 놓아야 했습니다. 수 십 개의 수감기관에서 각자 USB를 들고 와서 돌아다니면서 노트북에 자료를 넣습니다. 실질적으로 별로 중요한 자료도 아니고 이미 국회에 제출한 자료인데, 왜 수 십 개의 기관에서 주말에 직접 USB를 들고 가야 할까요? 그냥 국회에서 한 명이 취합해서 넣어놓으면 될 일을 말이죠. 심지어 의원들은 그 자료를 거의 보지도 않고 실제 하는 질의와도 거의 연관이 없습니다.
두 번째, 국정감사를 위해 만든 인쇄 자료를 각 의원실을 돌아다니면서 배달합니다. 예전에 한 번 공무원이 직접 배달하지 않고, 자료를 인쇄한 업체 직원이 배달해서 '성의가 없다'는 말이 나왔다고 하네요.
세 번째, 국정감사 전날에는 의원실을 돌아다니면서, 어떤 질의를 할 건지 질의 내용을 구걸해야 합니다. 어떤 의원실은 질의 절대 안 준다면서 문 앞에 붙여놓으며 잡상인 취급을 합니다. 어떤 의원실에서는 밥 먹는다고 나중에 오라며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연락이나 말도 없다가 국감 전날만 와서 이런다'라고 면박을 주면서 말이죠. 입장 바꿔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긴 했습니다.
하지만 국정감사라는 게, 원활한 질의 답변을 위해서 사전에 어떤 내용으로 질문할 건지 정도는 주어야 하는 게 당연한데, 그런 생각은 못하나 봅니다. 국정감사와 같은 기회에 정부에 호통치고, 호통치는 영상 편집해서 유튜브 숏츠나 만들려고 하니깐요.
국정감사 당일, 기관장님을 모시고 국회로 갔습니다. 기관장님은 국정감사에 조금 긴장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아무런 질의가 없어서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올까 봐 걱정되었습니다. 자료는 수 백개를 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적할 만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죠. 점심을 예약해 놓은 식당에 제시간에 못 가지 않을까 걱정만 되었습니다.
역시나 국정감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질의가 없었습니다. 현안으로 질의가 집중되었던 다른 기관 직원 분들이 저를 보며 매우 부러워했습니다. 그분들에 비하면 제가 했던 건 고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 달반 동안 '국정감사'라는 형식적인 통과의례를 위해
양식만 다르고 실질적으로 같은 내용의 요구자료와, 대체 왜 요구하나 싶은 국회요구자료 150건(약 1,000p), 매년 달라지는 형식의 기관소개자료 50p, 무슨 질의가 나올지 몰라 과도하게 만드는 예상질답자료 100p, 기타 참고자료 30p, 형식을 위한 형식인 수 십 가지 형태의 자료
위와 같은 형식적인 자료작성과 약 50여 시간의 초과 근무, 형식적인 국회업무를 위한 별도의 주말 출장 4회 등 그분들 못지않은 시간을 들였던 것 같습니다.
국정감사 또는 지방의 행정감사를 받는 기관은 공공기관을 포함해서 수 백개가 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의미 없고 비효율적인 작업으로 직접적인 고통받는 사람은 최소 수십 만 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국회가 조금만 권위와 형식주의를 내려놓는다면 국회와 행정부가 서로 훨씬 효율적으로, 존재의 목적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