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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노비와 점심시간

by freenobby

처음 공무원으로 발령 난 후 첫 주에는 거의 매일 점심에 회식이 있었습니다. 과에서 하는 환영회, 기관장과 함께하는 점심, 같은 팀 환영회 점심 등등 매일 맛있는 밥을 먹으러 나가면서, '아 이게 공무원의 삶인가' 하며 행복해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오늘 점심은 뭘까 하면서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옆 자리에 앉은 주무관님께 물어봤습니다.


: 주무관님, 원래 이렇게 매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주무관님: 이번 주만 좀 특히 그런 것 같아요 ㅎㅎ 원래 돈 없어서 이렇게 많이 하지는 않아요^^

: 아 이번 주에 많이 먹어 둬야겠네요

주무관님: 회식 가면 좀 불편하지 않아요? 되게 좋아하네 ㅎㅎ

: 그냥 뭐 밥만 맛있게 먹으면 되니깐요 ㅎㅎ

주무관님: ^^


주무관님의 마지막 웃음이 조금은 의미심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사실 점심을 누구와 먹는지보다는 그냥 맛있는 걸 먹는 게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몇 주 뒤, 과 내에서 서무업무를 맡았고, 직원 분들의 점심시간을 책임져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도 별로 중요한 업무가 없어서, 주된 오전 업무가 점심 예약하기였습니다. 다른 과는 그냥 다들 알아서 먹는 분위기였는데, 우리 과는 비교적 자주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과장님께서 구내식당을 별로 안 좋아하셨거든요.


점심시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예산, 맛집 탐색과 선택, 식당과의 거리와 이동방법, 참석인원 등등을 모두 조사해야 했습니다. 과장님은 분명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식당과 메뉴가 있으신데, 식당을 조사해서 '여기 어떠시냐'할 때까지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번거롭기도 했지만, 거의 얻어먹는 경우가 많고 가끔 새로운 맛집을 찾았을 땐, '이런 곳은 어떻게 찾았냐'며 직원들이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 나름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점심을 준비하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기관장님과 과 직원 분들이 함께하는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제 나름 또 신경 쓴다고 전날부터 거리가 조금 있는 맛집을 수소문해서 예약까지 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당일 오전, 같은 과 주무관님와 메신저를 하다가 식겁했습니다. 바로 어제 다른 과에서 오늘 예약한 식당을 기관장과 함께 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전화로 예약을 취소하려고 했으나, 식당 사장님께서 예약하면 전날부터 준비하는 메뉴라서 취소는 안된다고 엄청 역정을 내셨습니다. '어떡하지..' 하다가 그냥 기관장님께 '어제 드셨던 것 또 드셔도 괜찮으실지' 여쭤보았습니다.


기관장님: 음 그냥 다른데 가면 안 될까?

: 아 식당에서 예약 취소가 조금 어렵다고 그래서요..

기관장님: 그래? 흠 다시 좀 물어보지..?

: 네...


예약 취소가 안 되는 식당 사정을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불가하다고 했어야 했는데, 그 당시 기관장님이 매우 불같은 성격이시라 쫄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과로 돌아와 사무관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매우 난감해하시면서 '어떡하지..' 하며 깊은 고뇌에 잠기셨습니다.


그러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오시더니, '내가 말하고 올게!' 하며 아주 믿음직한 목소리로 선언을 하시고 기관장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셨습니다. 그때까지 본 사무관님의 모습 중 가장 멋지고 믿음직한 장면이었습니다.


기관장님과 말을 잘 끝내셨는지, 한참 자기가 어떻게 말했고 좀 강하게 말씀드려서 그냥 예약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면서 굉장히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래도 이게 짬인가' 하면서 감사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작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식당에서 회식을 하고 있는데, 기관장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기관장님: 어제는 메뉴가 하나 더 나왔었는데 오늘은 왜 없지?


뒤에서 듣고 있던 제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습니다.


: 아 그... 어제보다 한 단계 낮은 코스입니다...

기관장님: 아 그래? 허허허


악의는 없으셨겠지만, 순간 속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차가 쌓이면서 서무업무를 맡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식이 있더라도 그냥 부담 없이 밥만 먹고 오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입사 초에 느꼈던,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들뜬 마음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점심시간만이라도 그냥 편하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에서 나와서, 편한 동기들이나 나이가 비슷한 직원 분들과 따로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가끔은 기관 내에서 처음 뵙는 분들과 건너 건너 약속을 해서 함께 점심을 먹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심시간의 또 다른 의미와 역할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예전에 같은 기관에 계셨던 주무관님께서 몇 명 모아서 식사를 하자며 연락이 왔습니다. 잘 알고 지내던 분이 아니고 이야기도 거의 해본 적 없어서 조금은 뜬금없었지만 그래도 기억을 해주시고 연락을 해주셔서, 반가운 마음으로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며 요즘엔 어느 부서가 힘들고, 어디가 편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카페에서 이 만남의 '주된' 목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무관님: 이제 승진에 대비해야 하는데, 다면평가가 좀 낮아서 걱정이에요.. 왜 낮은지 이해가 안 가

: 아 다평 정말 신경 많이 쓰일 것 같아요..

주무관님: 잘 좀 부탁해요 주변 동기들한테 말도 좀 해주고..ㅎㅎ


승진 점수에 주변 동료가 평가하는 다면평가 점수가 반영되는데, 생각보다 큰 비율로 들어갑니다. 알고 보니 곧 다면평가를 하는 시즌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다면평가는 몇 년 정도 근무를 한 사람들만 평가를 할 수 있었는데, 당시에 저는 아직 그 정도 연차가 쌓이지 않아서 평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 저희는 근데 아직 평가를 못해서요.. 다음엔 꼭 할게요 ㅎㅎ

주무관님: 아 그렇구나 다음부턴 좀 부탁해요.. 호호호


조금 당황하고 아쉬운 표정을 숨길 수는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본인도 좀 민망해하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점심시간은 그냥 밥 먹고 쉬는 시간이 아닌 업무와 정치의 연장선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기관 내에서 평이 좋은 사람들은 기획이나 예산, 인사 부서 등 나름 끗발 있는 근무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하지 않아도 다면평가 점수가 잘 나옵니다.


한편, 기관 내에서 존재감이 비교적 부족하거나 소문이 좋지 못하면, 끗발 있는 부서에 가기 어렵고,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에 점심시간에도 이러한 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말 좋은 분들인데 여러 이유로 다면평가 점수가 안 좋은 분들도 왕왕 계셔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면평가 점수가 낮은 분들 중에는 정말 일 안 하고 욕먹을 짓만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도 다면평가 시즌이 되면 정말 이상한 루트를 통해서 점심 먹자고 연락이 옵니다.


예전에 근무하던 기관에서 눈인사만 했던 분께서 갑자기 반갑게 연락이 왔습니다. '좋은' 사무관님이 계신데 소개 한 번 해주고 싶다면서요. 조금 싸해서, 처음엔 시간이 안 맞다는 식으로 피했는데, 결국 약속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 '좋은' 사무관님은 동기 형님과 파트너로 근무하시던 사무관님이었는데, 평소에 안 좋은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서 이미지가 안 좋았습니다. 일은 동기 형님한테 다 넘기고, 본인 승진해야 한다며 동기형님에게 신규사업을 구상하라고 하면서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심지어 업무시간에 거의 매일 잠을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 그런 인간이 다 있냐' 했던 사람인데 식사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점심 메뉴까지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버섯전골을 시켰습니다. 전골이 다 끓어서 이제 먹어야 하는데, 국자를 들기가 무섭게 식사를 주선했던 주무관님이 말을 계속 이어 갔습니다.


주무관님: 우리 사무관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예전에 ㅇㅇ사업도 하고 ㅇㅇ도 하고 그죠 사무관님~


사무관님은 멋쩍은 듯 살짝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사무관님: 아 뭐.. 그때 그랬지..

주무관님: 주무관님도 사무관님과 좀 잘 알아두면 좋을 거예요. 사람도 잘 챙기시고 정말 좋은 분이에요^^

: 아 네... ㅎㅎ

주무관님: 이렇게 좋은 분 들하고 식사하니 너무 좋네요^^ 어서 드세요.


겨우 국자로 전골을 떠서 그릇에 넣고 이제 떠먹으려고 하는데 또 말을 하셨습니다.


주무관님: 얼마 전에 그 보도자료 보셨어요?? 그거 사무관님이 하신 거예요

사무관님: 에이 뭐 그런 걸 밥 먹는데 말해요...

: 아아 본 것 같아요 그렇군요..ㅎㅎ 고생 많으셨겠네요.

주무관님: 그러니깐요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시는데요

사무관님:....ㅎㅎ


식사 내내 주무관님은 사무관님에 대한 칭찬 공격을 이어갔고, 밥이 위에서 겉도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앞에서 칭찬하는 것 처음 봤습니다. 사무관님도 양심에 찔리는지 칭찬에 멋쩍어하시더니, 결국엔 역시나 평가 좀 잘 부탁한다며 마무리하셨습니다.


다면평가를 하면서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그래도 밥을 사준 사람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이런 사람이 승진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평가를 하지 않고 넘겼습니다.


그냥 최하점을 주고도 싶었지만, 클릭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나중에 내가 저 입장이 될 수도 있는데...'


나의 점심시간도 언젠가는 저런 시간으로 채워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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