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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노비와 전화

공노비의 연차별 전화대응

by freenobby

공무원 생활 초반에 가장 두려웠던 것이 '전화'였습니다. 무슨 질문이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바로바로 생각해서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전화벨이 울릴 때면, 긴장한 상태로 수화기를 들곤 했었습니다.


출근하고 몇 주 정도가 지나니, 내부에서 오는 전화는 편해졌습니다. 어차피 조직 내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모르는 건 그냥 알아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하면 되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문제는 외부에서 오는 전화였습니다. 공무원은 전화 앞에서는 '슈퍼 을'이라는 것, 그리고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평화로운 오후에, 어떤 아저씨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받자마자 그 아저씨는 뜬금없는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아저씨: 뭐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프랑스에 ㅇㅇ분야 예산이 얼마나 돼요?


처음엔, '공무원은 원래 이런 것도 알아야 하나?' 하면서도 '이게 우리 기관이랑 무슨 상관이지..?' 속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습니다.


: 음.. 잘 모르겠네요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실까요?

아저씨: 어휴 공무원이 그런 것도 몰라요? 00조잖아요 00조!


알면서 왜 물어볼까 싶으면서도 아저씨의 다그치는 말투에 주눅이 들었는지, 무의식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저씨: 그러면 우리나라 ㅇㅇ분야 예산은 얼마예요?


'우리 기관 관련 예산인데 이건 내가 알아야 하나? 어쩌지..?' 하면서 여기저기 들었던 말을 토대로 이야기했습니다.


: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00조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아저씨: 그것도 몰라요? 나도 아는데? 정확히 00조 000억입니다

: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내가 뭔가 부족해서 대답을 못했던 것 같아서 순간 정말 우리 기관과 관련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니 '대체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걸까' 싶었습니다.


아저씨: 공무원이 그런 것도 몰라서 써요?? 나도 아는데? 몇 급이에요?

: 네.. 그렇게 되었네요.. 선생님 죄송한데 어떤 것 때문에 전화 주셨을까요?


그때부터 아저씨의 만담이 이어졌습니다.


아저씨: 내가요 지금은 집에서 이렇게 있지만 원래 기자 출신이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본인의 인생사를 10분 넘게 이야기하시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네.., 네..' 하면서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 끝날까 하면서 멍 때리고 듣다가 갑자기 '라디오'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아저씨: ㅇㅇ에는 라디오가 참 많이 발전했어요. 근데 우리나라는 왜 그런 거예요?

: 라디오요..? 뭐가 어떻다는 걸까요..?

아저씨: 다음 주까지 라디오 발전방안에 대해서 좀 연구해서 나한테 보내줘요


순간, '내가 이런 걸 해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조금 뜸 들이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용기 내어 한마디 했습니다


: 선생님 죄송한데 그걸 제가 해서 드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저씨: 아니 공무원이 말이야 적극적으로 뭔가를 할 생각을 해야지 안 그래요?

: 죄송한데 그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잠시 공방이 이어졌고 결국 아저씨는 포기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전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아저씨: ㅎㅎ 암튼 고생이 많아요. 내가 귀찮게 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 다음에 또 연락할게요

: 아휴 아닙니다 ^^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화가 났지만 오히려 이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친절함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뭔가 내가 전화응대를 잘 못한 건 아닐까 싶어 옆에 있는 주무관님께 방금 했던 전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무관님: 어휴 별 인간이 다 있네. 그런 미친놈은 또 처음 들어보네요




그 이후로도 가끔 이상한 전화를 받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3년 차에 들어설 때즈음이었습니다. 악질 중의 악질 전화 민원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요구하는 민원의 요지는 우리 기관에서 만든 영상이 본인이 몸담고 있는 학설 또는 학파의 내용과 맞지 않으니 수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 확인을 해보니, 우리 기관에서 만든 영상은 국내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내용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라 문제가 없었습니다.


관련 내용으로 전화로 다시 설명을 하니, '그건 오류가 너무 많은 주장이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수정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안 된다고 완강하게 말을 했더니 그때부터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악질 민원인: 기관장 바꿔!!

: (계셨지만) 안 계셔서 바꿔드릴 순 없습니다.

악질 민원인: 과장이라도 바꿔!!

: (계셨지만) 오늘 안 계십니다.

악질 민원인: 이런 XX 언제 오는데요?

: 오늘은 쭉 안 계십니다. 그리고 욕을 하시면 안 되죠 선생님

악질 민원인: 욕은 미안합니다. 내일 다시 전화할 거예요


그분의 전화는 10일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때마다, 똑같은 주장을 반복하셨고 대체 언제 기관장이나 과장이 오냐며 다그쳤습니다. 옆에서 보던 과장님도 안 되겠는지 본인한테 바꾸라고 하셨고, 통화를 하셨지만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거의 몇 주 동안 이틀 간격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하면 기본 30분이 지나갔습니다.


그때 획득한 전화스킬이 있었습니다. 수화기를 귀뒤에 대는 것이었습니다. 수화기를 귀뒤에 대면 목소리는 아주 엷게 들렸고, 언제 말을 중간에 끊는지 정도는 알 수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듣지 않고도 '네.. 네..'와 같은 반응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전화를 응대했습니다. 목과 어깨로 수화기를 고정하고 손은 움직여야 했기에 목은 조금 아팠지만 나름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분은 전화와 함께 국민신문고에도 수십 차례 민원을 넣으셨습니다. 민원을 대응하다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다른 기관에는 본인의 배우자와 자녀의 이름으로 번갈아가며 민원을 1.1만 건이상 넣은 전력이 있으셨습니다. 저는 약 한 달 정도 시달렸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무원 6년 차에 들어서니, 이제는 외부 민원 전화가 그리 무섭지 않았습니다.

(물론, 국회의원실이나 기자들은 예외였지만 말이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내 업무 담당이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었고, 가끔 오는 이상한 전화도 뇌를 빼고 귓등에 수화기를 대고 몇 분 들어주다가 출장이나 회의가 있어서 가야 한다고 말하고 끊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다 또 한 번 막강한 민원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기관에서 주최하는 공모전 지원 기준에 미달하여, 공모전에 지원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본인이 나갈 수 없으니 지원 기준을 바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름의 사정은 이해가 갔지만, 그 주장은 공모전의 취지와 맞지 않았고, 공고 중인 상태에서 기준을 전화 하나 때문에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니, 이해할 수 없다면서 같은 말은 반복하셨습니다. 본인이 청와대든 감사실이든 권익위원회 기자든 민원 넣을 수 있는 곳은 다 넣겠다고 하시기에 그렇게 하시라고 받아쳤습니다.


며칠 뒤 또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민원인: 저 녹음할 건데 괜찮으세요?


녹음이라고 하니 조금 무서웠지만,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습니다.


: 네 뭐 그러시죠..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들어도 괜한 이상한 프레임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유도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민원인: ㅇㅇ 기관에서는 공모전 기준을 ~~~ 로 하면서 어려운 사람들보다는 이미 잘 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원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질문에 말려 들면 괜히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즉답을 피하고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 저희는 공모전 취지에 따라 기존에 공고된 내용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민원인: 예, 아니오로 대답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대답하세요? 다시 한번 물을게요. ㅇㅇ 기관에서는 공모전 기준을....


: 저희는 공모전 취지에 따라 기존에 공고된 내용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몇 번 반복하더니 지쳤는지 민원인은 전화를 끊었습니다.


스스로 잘 판단해서 위기를 잘 넘겼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정말 이제 공무원이 다 되었구나' 싶은 생각에 조금은 서글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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